[시 읽어주는 남자] 연두의 저녁

‘연두’처럼 수줍게 다가온… 푸르른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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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의 저녁

   - 박완호

연두의 말이 들리는 저녁이다 간밤 비 맞은 연두의 이마가 초록에 들어가기 직전이다 한 연두가 연두를 낳는, 한 연두가 또 한 연두를 부르는 시간이다 너를 떠올리면 널 닮은 연두가 살랑대는, 널 부르면 네 목소리 닮은 연두가 술렁이는, 달아오른 햇살들을 피해 다니는 동안 너를 떠올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지점에 닿을 때까지 네 이름을 불렀다 지금은, 나를 부르는 네 목소리가 들려올 무렵이다

<기억을 만난 적 있나요?>, 시인동네, 2018

부처님의 게송을 엮은 <법구경>에 “향 싼 종이에 향내가 나고 생선 싼 종이에는 비린내가 난다.”는 말이 있다. 무엇을 싸느냐에 따라 결과가 다를 수 있다는 교훈을 전하는 말이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은 아무것도 싸지 않은 순수한 종이와 같다. 행실에 따라 이름에 향내가 날 수도, 비린내가 날 수도 있다. ‘이름값’이란 바로 그런 것이라 생각된다. 

어릴 적 이름과 지금의 이름은 변함이 없겠지만 이름에 묻은 값어치는 다를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찔린다. 나는 ‘나’의 이름을 잘 간수해왔을까? 가끔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를 때 못들은 척할 때가 있다. 상대방이 싫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대개는 켕기는 일을 해서 대답을 하지 않는 경우다.

인간관계란 ‘호명’(呼名)하고 ‘대답’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유명한 시구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치 않을 만큼 널리 회자되고 있다.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이 세계는 따뜻해지고 아름다워진다.

 

박완호 시인의 ‘연두의 저녁’은 호명의 애틋한 심정을 ‘연두’라는 빛깔에 담아 전하고 있어 읽는 이의 심정을 생기 있게 만든다. “연두의 말이 들리는 저녁이다”는 첫 구절은 4월쯤의 나무들이 뿜어내는 연둣빛의 아찔함을 한껏 연상시킨다. 

초록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연둣빛은 신비롭다. 특히, 저녁 무렵의 연둣빛은 황홀하기 그지없다. 생명력을 잔뜩 머금은 연두와 박명(薄明)의 어스름이 빚어내는 저 풍경은 차라리 음악이라 해야 마땅할 것 같다. “연두가 연두를 부르는” 호명의 시간은 ‘살랑대고’, ‘술렁이는’ 설렘의 리듬으로 가득 찬 그리움과 사랑의 시간으로 한껏 부풀어 오른다.

이러한 사랑의 연둣빛 정취는 풍경을 소리로 감식하는 시인만의 예민한 감각이 빚어낸 내면의 아련한 음악일 것이다. 연두의 말을 전해듣는 시인의 ‘달아오른’ 귀는 또 다른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듯하다. ‘너’로 지칭된, 연두를 닮은 어떤 대상의 응답을 간곡히 기다리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지점에 닿을 때까지” 그 이름을 목 놓아 부르는 시인의 모습이 참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나’를 호명하는 ‘너’의 목소리가 들려올 봄밤의 ‘무렵’이라는 낭만의 애절한 시간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이 반갑기만 하다.

 

박완호 시인의 ‘연두의 저녁’을 읽으면서 “한 장소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사라져 버렸고/한 인간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이미 사망했으며/시절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이미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레이몽 크노(Raymond Queneau)의 ‘은유들의 설명’이라는 시를 함께 떠올려 본다. 사라져 버린 낭만의 시간과 장소들이 속절없이 그리워진다. 그래도 아직은 남아있을 몇몇의 ‘낭만들’을 ‘호명’하는 시인들의 목소리가 애틋한 시절이다. 핸드폰일랑 던져버리고 벚꽃들의 부름에 소소한 낭만의 화답이라도 해봐야겠다.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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