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7. 시대를 아파한 이이의 정신이 숨 쉬는 파주 ‘율곡선생유적지’

책속에만 있던 ‘安民’ 세상속으로 끌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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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운서원 전경
파주시 법원읍에 자리 잡은 율곡선생유적지에 들어서면 율곡 이이(1536~1584)와 신사임당(1504~1551)의 동상이 서 있다. 어머니와 아들의 거리는 가깝지만, 방문객과의 심리적 거리는 멀게 느껴진다.

 

두 분은 분명 우리 역사에서 다시 찾기 어려운 위대한 어머니와 아들이다. 그러나 위인과 범인의 거리감을 줄이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저들은 위대할 뿐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대상으로 남게 된다. 높지만 가파르지 않고 빛나지만 눈부시지 않을 때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다가갈 수 있고 가까워질 수 있는 법이다.

 

따라서 아홉 번 장원한 천재의 신화와 시서화를 두루 갖춘 빼어난 예술가이자 자녀 교육의 모범이라는 이미지에 갇혀 있으면 이율곡과 신사임당의 본 모습에 다가서기 어렵다.

그런 면에서 두 인물에게 씌워진 위인으로서의 고정된 이미지를 걷어내야 할 필요가 있다.

 

■ 파주, 한국유학의 성지

이이는 20세에 스스로를 경계하는 글 ‘자경문’을 지었다. 입지(立志)부터 용공지효(用功之效)에 이르는 11가지 항목으로 세분하여 삶의 자세를 가다듬었던 그는 ‘입지’에서 이렇게 다짐한다.

 

“무엇보다 먼저 뜻을 높은 데에 두어야 한다. 성인을 본보기로 삼아, 조금이라도 성인의 가르침에 미치지 못한다면 나의 일은 끝난 것이 아니다.”

 

스무 살 젊은 나이에 높은 뜻을 세우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평생 분투했던 율곡 이이의 정신이 깃든 곳이 파주 율곡선생유적지이다. 이곳은 1973년에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고, 2012년에는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되었다. 입구에 서 있는 율곡선생신도비를 비롯하여 자운서원, 율곡 집안의 묘지 등 율곡 이이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들이 널려있다. 

여기에 이이와 어머니 신사임당의 생애를 더듬을 수 있는 율곡기념관도 갖추고 있어 학생들도 많이 찾고 있다. 이곳은 부모와 자식 및 부부의 바람직한 관계, 날로 어려워지는 자녀교육 문제, 올바른 정치가의 자세, 우정과 예술 등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삶의 주제를 생각하고 토론해 볼 수 있는 지적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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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성사에 모셔진 율곡의 초상
■ 자운서원과 율곡의 묘소

정문의 왼편 언덕에 있는 ‘율곡 이이 선생 신도비’는 이이가 세상을 떠난 지 47년이 지난 1631년에 건립되었다. 비문은 영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이 짓고, 글씨는 선조의 사위 신익성이 쓰고, 전액은 김상용이 썼다.

 

자운서원은 율곡 이이의 제자 사계 김장생을 비롯한 유림들이 그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파주 호명산 아래 율곡서원을 세우고 위패를 봉안한 것이 시초이다. 이후 율곡의 묘소가 있는 자운산 자락으로 광해군대(1615)에 이전하여, 1650년에 효종으로부터 ‘자운(紫雲)’이라는 친필현판을 받았다. 이후 이곳에 박세채와 김장생을 추가로 배향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47개만 남기고 서원을 모두 혁파했을 때 한 분의 선현은 한 서원에만 배향한다는 원칙에 따라 사액서원이지만 철폐되고 말았다.

서원의 남은 건물마저 한국전쟁으로 모두 사라졌다. 서원을 건립할 때 심었을 아름드리 느티나무 두 그루와 ‘자운서원묘정비’만이 터전을 지키다가 1970년에 유림들이 국가의 지원을 받아서 과거자료 고증을 통해서 복원하였다.

 

1683년 우암 송시열이 율곡의 학덕을 기리고 서원의 건립 내력을 기록한 글을 명필 김수증이 예서체로 쓴 자운서원묘정비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7호로 지정되었다. 2단으로 이루어진 받침돌은 아랫단은 4장의 돌로 짜 맞추고, 윗단은 옆면과 윗면에 각각 구름과 연꽃무늬를 조각했다.

 

강학공간인 강인당과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를 갖추고, 이율곡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 문성사(文成祠)가 자리 잡고 있다. 사당 좌우에는 김장생과 박세채 두 분의 위패도 모셔져 있다.

 

자운산 자락에 자리를 잡은 율곡 집안의 묘역으로 가려면 여현문(如現門)을 통과해야 한다. 계단을 오르면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의 묘소가 나타나고, 이어 율곡과 부인 곡산 노씨의 묘소를 비롯하여 율곡의 형과 누이, 후손에 이르는 묘소가 모여 있다. 이이의 묘비에는 ‘문성공 율곡 이선생지묘 정경부인 곡산 노씨지묘 재후’라는 글자만 새겨져 있어 생전의 단아한 성품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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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곡의 묘소

■ 이율곡의 사상

어머니 사임당의 사랑을 받으며 곱게만 자랐을 것 같은 이이도 혹독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아버지 이원수의 여자문제로 이이를 비롯한 자녀들과의 갈등은 심각했던 모양이다. 게다가 16살에 맞은 어머니 사임당의 죽음은 소년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르며 이이는 삶과 죽음, 인생에 대해 깊은 사색에 빠져들었다. 삼년상을 마친 이이가 아버지에게도 알리지 않고 홀연히 금강산으로 들어갔던 것도 아버지와 불화 때문이다. 금강산에서 1년 동안 불교를 공부하다가 이 길이 아니다 판단하고 하산했다. 하산한 이이는 앞에서 언급한 ‘자경문’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여 이듬해 과거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이는 39세가 되던 해에 우부승지로 재직하면서 선조에게 올린 만언소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조선을 개혁할 방안을 1만5천자로 풀어쓴 이 상소문을 받은 선조는 “옛사람도 여기에 더할 수 없겠다. 

이런 신하가 있는데 어찌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음을 걱정하겠느냐?”고 화답했다. 그러나 선조는 이이가 힘써 주장한 제안을 하나도 실행하지 않았다. 정치가로서 이이는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왕조국가에서 임금이 어떠냐에 따라 정치의 성패가 결정된다. 

그런 면에서 이이의 정치적 좌절은 선조의 우유부단하고 사람을 믿지 못하는 성품과 관련이 깊다. 이이는 선조가 성군이 되기를 바라며 <성학집요>를 지어 바쳤다. 선조는 전쟁 중에도 경연을 열 정도로 학문에 열성을 보였으나 지혜로운 왕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이의 불행이자 조선의 불행이었다.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이이는 <성학집요>, <격몽요결>, <학교모범>이라는 세 권의 교육관련 책을 지었다. <성학집요>는 임금을 위한 것이고 <격몽요결>은 일반 초학자를 위해 지은 것이며 <학교모범>은 공립학교라 할 관학 교육을 위한 책이다.

 

이율곡이 세운 사상의 뼈대는 이기일원론으로 이와 기는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理)는 우주의 체(體)가 되는 당연한 법칙이고, 기(氣)는 체의 활동을 구체화하는 용(用)이라는 이기일원론이다. 이이의 사상과 철학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짙다. 이와 기는 하나이면서 둘이며, 둘이면서 하나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십만양병설’은 이이의 삶에 늘 따라 붙는 말이다. 머잖은 날에 큰 변란이 있을 것을 암시하며 군대를 양성하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의 병력을 배치할 것을 주장했다는 율곡이 임종 직전에 남긴 말도 국방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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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적지 경내에 있는 신사임당과 율곡의 동상

■ 화석정에서 민족의 봄을 노래하다

임진강 언덕에 율곡 이이가 사랑했던 정자 화석정이 서 있다. 임진강은 분단을 상징하는 곳이지만 불과 100년 전만 해도 경기도와 황해도를 잇는 동서교통의 요지로 사람과 화물을 실은 배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던 곳이다. 율곡은 화석정에서 우계 성혼, 송강 정철 같은 지우들과 안민을 위한 정책을 논의하고 몰려든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학문과 정치의 길은 하나라고 믿었던 율곡의 정치철학은 안민(安民)으로 귀결된다. 사림이 분열해서는 정치의 목적인 안민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에 동서로 나뉜 사림의 화해와 협력을 위해 죽는 날까지 힘을 쏟았다. 율곡이 실천한 안민은 백성들의 생활에 구체적으로 도움이 되는 정책이었다. 이러한 율곡 이이의 안민사상은 오리 이원익, 잠곡 김육으로 이어져 대동법이라는 이름으로 실현되었다.

 

2018년 봄은 남북이 화해와 협력의 풋풋한 기운이 싹트고 있다. 율곡 이이가 노래한 ‘화석정’은 툭 트인 기상과 풍류가 느껴진다.

산토고윤월(山吐孤輪月)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강함만리풍(江含萬里風) 강은 만 리의 바람을 머금었네.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 왔다. 가까운 날에 좋은 사람들과 율곡선생유적지를 둘러보며 모자가 왜 화폐의 주인공이 되었는지 토론해 보고, 화석정에 올라 임진강을 굽어보며 이런 소망을 기원하면 어떨까. 갈등과 대립을 멈추고 남북이 화해하고 협력하여 하나가 되는 그날을!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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