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4.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 정암 조광조

타락한 조선사회 개혁… 도덕적인 이상 국가 건설 꿈꾸다

정암 조광조를 배향하는 심곡서원. 서원 바로 앞 광교산 등산로 초입에는 조광조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정암 조광조를 배향하는 심곡서원. 서원 바로 앞 광교산 등산로 초입에는 조광조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용인 수지에는 심곡서원(深谷書院)이 자리하고 있다. 

선조 38(1605)년 서원이 건립되고 효종 때(1650) 조정에서 서원의 명칭을 부여한 현판과 서원의 운영에 필요한 서적이나 노비를 받는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야말로 국가가 공인한 서원으로 격상되었다. 대원군이 서원철폐의 철퇴를 휘두를 때도 훼철되지 않았던 서원이다.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를 배향하는 서원이었기 때문이다. 심곡서원 바로 앞 광교산 등산로 초입에는 정암 조광조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조광조는 1519년 전남 능주(화순)로 유배간지 한 달여 만에 임금이 내린 사약을 들이키고 절명시를 남기며 죽는다. 그의 나이 38살이었다.

愛君如愛父 임금을 섬겨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듯 하였노라

憂國如憂家 나라걱정 돌보기를 식구 걱정 돌보듯 하였노라.

白日臨下土 밝은 태양 대지를 환히 밝혀주니

昭昭照丹衷 내 정성어린 속마음 거울처럼 비쳐지네

■ 개혁가 조광조의 원대한 꿈

조광조가 이처럼 뜨겁게 사랑했던 임금은 바로 조선역사상 최초로 반정에 의해 추대되었던 중종이었다. 연산군이 흥청망청 국정을 농단하고 반유교적 정치로 적폐가 쌓이고 쌓이자 신하들은 ‘바른 것으로 돌리자’며 반정(反正)을 일으켰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중종은 집권초기 반정 삼인방인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의 눈치를 보며 조회가 끝나고 물러갈 때면 일어났다가 문을 나간 연후에 자리에 앉을 정도로 신하들의 눈치를 보는 허약한 군주였다. 

그러나 집권 10여 년이 지나면서 반정공신들이 하나 둘 사망하자 왕권을 강화하면서 ‘나라를 나라답게’ 하고자 나섰다. 중종은 사림들의 존경을 받는 조광조를 개혁의 파트너로 발탁했다. 조선이 직면한 적폐문제를 성리학으로 진단하고 처방해야 한다는 조광조의 주장에 공감했던 것이다. 조광조는 중종의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하며 ‘성리학 나라 만들기’에 박차를 가했다. 이를 위해 조광조는 ‘성리학 나라 만들기’ 교본에 따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치열하게 실천했다. 

먼저 성리학적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도학정치(道學政治)로 왕도(王道)를 세워야 했다. 충신의 화신으로 받드는 정몽주와 자신의 스승 김굉필을 문묘에 배향하여 도통(道統)을 세웠다. 둘째는 성리학적 이념에 위배되는 소격서를 혁파했다. 망설이는 왕을 설득하기 위해 하루에 몇 차례나 아뢰며 새벽닭이 울 때까지 계속하다가 끝내 요청대로 허락을 받고서야 물러 나올 정도로 집요했다. 중종에게 소격서는 왕이 하늘에 나라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왕의 고유권한이었지만, 조광조에게는 ‘백성에게 사도(邪道)를 가르치는 것’이자 ‘왕정으로서는 끊고 막아야할 것’이었다. 

셋째는 성리학 국가를 만들기 위해 초야에 묻혀 있는 인재를 대거 등용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으로 현량과를 신설했다. 또 세자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중종을 성군으로 만들기 위해 경연을 강화하여 아침 조강, 낮 주강, 야간 석강, 특강 및 보강까지 열었다. 넷째는 개혁의 칼날을 휘두를 수 있는 대사헌(현재의 검찰총장)으로 초고속 승진한 후 117명의 반정공신들의 훈작을 재조사하여 이 중 76명이 거짓된 훈작이라며 삭제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반정공신들의 기득권을 박탈하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반발은 거셌다. 그들은 조씨가 왕이 된다는 ‘주초위왕(走肖爲王)’으로 반격했다. 급진 개혁에 피로를 느끼던 중종은 사건이 발생한지 4일 만에 사림의 영수 조광조를 전격적으로 파직하고 유배 보냈다. 그를 지지하던 사림들까지 체포하여 주변을 고립화시켰다. 이로써 도학정치로 왕도를 세워 성리학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조광조의 원대한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용인 수지에 있는 정암 조광조 선생의 묘.
용인 수지에 있는 정암 조광조 선생의 묘.
■ 이상과 현실의 간극

조광조에게 있어서 당대의 개혁과제는 성리학 나라 만들기에 너무나 중대하고 시급한 시대적 과제였지만 그 방법은 너무 조급했다. 그는 중종에게 요순시대의 “삼대의 정치를 지금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 방법도 아주 쉽습니다” 하며 자신만만했다. “먼저 임금 자신이 덕을 닦고 나서 그 방법을 사물에 옮겨 행한다면 사람들이 모두 감화하여 자연 덕을 닦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임금이 수신을 하고 덕을 쌓아 주변으로 차츰 넓힌다면 다른 사람들도 덕을 쌓아 왕도의 나라, 성리학의 질서가 도래하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 쉬운 방법을 두고 왜 못한단 말인가. 그래서 그는 유배지에서도 북쪽을 보며 그 실낱같은 희망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고 시대적 요구사항을 시의 적절하게 간파하여 타락한 조선사회를 개혁하여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방법이 서툴렀다. 또 다른 사례를 보자.(정암선생문집) 1518년 변경에 여진족 속고내가 몰래 침범하여 사람과 가축을 많이 잡아가서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조정에서 “이를 징계하지 아니하면 성밑 야인이 계속하여 서로 반란할 것이니 난이 일어난 후에는 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급히 변방을 잘 아는 중신을 보내어 감사, 병사와 함께 조치하여 잡고 법을 두어 후일을 징계하소서”했다. 그러자 조광조가 “이것은 속이는 것이요 바른 것이 아니니, 왕도(王道)가 군사를 어거하는 도가 아니요 곧바로 담을 뚫는 도적의 꾀와 같은 것입니다. 

당당한 성조(聖朝)로서 일개 보잘 것 없는 오랑캐 때문에 도적의 꾀를 써도 나라를 욕되게 하는 줄을 알지 못하니 신은 그윽이 부끄럽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병조판서 유담년이 버럭 화를 내며 “옛말에 밭가는 일은 종에게 물어야 하고 베 짜는 일은 여종에게 물어야 한다…물정을 모르는 선비의 말은 예부터 이와 같이 비록 이치에는 가까운 듯하나 형세는 다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라고 반박한다.

 

조광조는 오랑캐가 쳐들어와 힘없는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강탈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기습작전 같은 군사전략은 도적의 꾀와 같고 나라를 욕되게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오랑캐를 군사작전으로 일망타진하는 것은 속이는 것이고 바른 것이 아니다. “이적(夷狄)일지라도 사람의 마음이 있으니, 만약 성의로 움직이면 복종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오직 도덕만이 전략이다. 도덕과 전략이 하나 된 사고방식이다. 이 땅에 유교문명을 건설하겠다는 당찬 꿈을 가슴에 품고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한 개혁가 조광조의 모습과 물정도 모르는 선비 조광조의 모습 사이의 간극은 실로 크다 하겠다.

 

이 사상적 간극은 조선의 사상적 유산으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왕도의 꿈은 사림의 사상적 지표가 되었지만 그러나 패도를 탈각시키는 우를 범했다. 인류문명사에서 어느 역사가 도덕으로만 존재한 적이 있었는가? 물리적 힘을 상징하는 패도 없이 문명이 구축된 역사가 있는가? 물리적 폭력 없이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평화를 누린 적이 있는가? 왕도와 패도는 국가경영의 두 축이다.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된다. 그 균형의 상실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왕도 없는 패도는 맹목적이고 패도 없는 왕도는 허약하다.

 

조광조 영정
조광조 영정
■ 조선정치사상사의 성지

심곡서원은 이런 사상의 갈래들을 생각나게 하는 곳이자 조선정치사상사의 도통의 정맥이 도도히 흐르고 있는 곳이다. 도덕으로 무장된 이상 국가를 건설하고자 분투했던 정암 조광조. 조광조 선생의 염원이 서려 있는 심곡서원은 아쉽게도 아파트 숲에 가려 있어 찾기조차 쉽지 않다. 그러나 대문에 들어서면 역시 좋은 터에 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서원에는 조광조 선생이 아버지 시묘살이를 하면서 심었다는 수령 500년 된 아름다운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사상의 칩처럼 뿌리 내리고 서 있다. 성리학 나라 만들기를 위해 개혁을 온몸으로 실천했던 조광조의 사상은 은행나무의 뿌리처럼 오늘날 우리들의 사유방식에도 깊게 각인되어 있다. 

서원은 앞에 강당이 있고, 뒤쪽에 사우가 배치된 조선시대 서원의 전형인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을 갖추고 있다. 현재도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고 있는 강당에는 숙종이 내린 어필 현판과 서원의 규약, 중수기 등 서원의 역사와 내력을 알 수 있는 유물이 걸려 있다. 서원 근처에는 조광조 선생이 잠들어 있는 묘역이 있으니 빠트리지 말고 둘러볼 일이다.

 

권행완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편집위원장(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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