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부자(父子) 간에도 나누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듯이, 이처럼 부자간 권력으로 불화를 일으킨 왕이 우리 역사에 10명. 앞에 말한 고려 충렬왕 부자, 조선 태조와 태종, 흥선대원군과 고종 등등….
이와 같은 현상은 동ㆍ서양이 똑같고, 왕권이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역시 ‘권력’은 나누기 힘든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처음 이질적인 정당이나 정파가 의회 장악을 위해 공동정부, 연합정부를 결성해도 어느 순간 이해관계가 충돌하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만다.
우리나라의 경우 ‘김대중-김종필’의 소위 DJP연합이 그렇다.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DJ의 새정치국민회의는 79석 얻는데 그쳤다. 그러자 다음 대선의 위기를 느낀 DJ는 충청도를 기반으로 한 김종필(JP)와 손을 잡고, 대통령에 당선되면 초대 총리는 JP가, 경제부총리는 총리가 지명하기로 하며 16대 국회에서 내각제개헌을 하기로 합의했다.
DJP는 다시 박태준까지 합류시킴으로써 자신의 색깔론을 희석시키고 호남외에 충청권까지 지지구도를 넓힐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
과연 DJP연합은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하여 ‘연합정부’를 출발시켰다. 그러나 16대 국회에서 내각제개헌이 물건너가는 등 내부 갈등이 고조되면서 연정은 붕괴됐고, JP와 자민련은 급격히 정치력을 잃기 시작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2005년 한나라당에 연정을 제안한 바 있다. 재보선에서 여당인 ‘우리당’이 과반에 미달, 정책추진이 매우 힘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나라당이 이를 거부하여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만약 그때 한나라당과 연정이 되었다면 정치적 안정은 꾀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집권세력을 견제할 세력이 없어진다는 비난은 면치 못했을 것이다.
3년 반 전, 경기도가 광역지방자치단체로서는 전례에 없는 ‘연정’을 출발했을 때 한국정치의 속성을 너무나 많이 체험한 국민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그 연정의 가능성에 회의적인 사람까지도 새로운 지방자치의 모델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갖게 했다. 무엇보다 정무 부지사를 민주당에 넘겨 주고 도 산하기관장(지방공기업)도 민주당에 양보하겠다는 것은 DJP연합을 연상시킬 만큼 파격적이었다.
그러나 도 예산의 상당부분을 도의회에 할애하기로 했으니 남경필 도지사는 소수당으로서 겪어야 할 정치적 불안을 극복하는 것 외에 손에 쥐는 것이 무엇일까? 이 작은 것을 위한 정치적 거래를 ‘연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것은 아닌가? 도대체 그 막대한 예산을(국민의 세금) ‘연정 예산’이라는 이름으로 도민들의 민의를 무시한 채 사실상 나눠먹기가 아니었느냐는 비난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다 임기는 남았는데도 ‘연정’은 끝내 버렸다. 마치 아이들이 소꿉놀이하다 판을 엎는 것과 같다. 연극이 끝나기도 전에 막을 내려버린 야외공연장, 불빛은 꺼지고 빈의자만 흐트러져 있는 황량한 무대를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연정중단이 선언되자마자 민주당측에서 서울시 미세먼지 공짜운행을 비난한 남경필 지사를 비판한 것을 보면 역시 중앙정치고 지방정치고 ‘연정’은 “시작은 창대하나 끝은 초라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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