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성경에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을 믿고 동료들과 상의한 끝에 문서 창고를 뒤져 비슷한 내용의 보고서를 발견했다. 국무총리까지 역임했던 분이 과장 시절 손으로 쓴 보고서였다. 20년도 넘은 보고서였는데 내용이 훌륭해 제목을 ‘후진국형 인재 대응방안’으로 그럴싸하게 바꾸어 올렸더니 칭찬이 자자했다. 기분은 좋았지만, 후진국형 사고는 반복됐고 그것도 갈수록 대형으로 진행됐다.
2017년, 다시 25년 세월이 흘렀다. 불행히도 달라진 것은 없다. 대책은 보고서에 다 있었지만 실천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영흥도 낚싯배 추돌사고와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로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세월호 침몰사고의 트라우마 때문에 대통령 보고는 신속했으나 구조대 늑장출동이나 현장 대응은 미흡했다. 제천화재도 부실대응으로 너무나 안타까운 참사였다.
죽고 사는 게 완전히 운수소관인 세상이 됐다. 일련의 대형사고를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은 이런 사고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각자도생(各自圖生)만이 살길이라는 서글픈 현실이다. 국가가 나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미몽(迷夢)에서 깨어나야 후회도 없다.
사람 사는 곳에 사고는 필연적이다. 하지만 머리를 잘 쓰면 많은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고 현장대응을 잘해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사고를 유형별로 정리해 실전 대응훈련을 일상화하는 것이다. 뻔한 얘기지만 이런 뻔한 말을 무시해 뻔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 낸다. 우리가 실전대비 훈련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막상 사고가 터지면 우왕좌왕하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상황을 상정하고 진지함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는 매년 을지연습을 한다. 거기에 보면 전쟁이 발발하면 주민들을 피난, 소개(疏開)해 남쪽 지역으로 이동하는데 과연 가능할까? 나는 파주에 사는데 자유로, 통일로 다 막혀 꼼짝도 못하고 그냥 사는 집에서 버티는 수밖에 없다. 북한 미사일이 많지도 않을 텐데 파주에 쏠리는 없고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국가에서 부르면 총을 쥐든지 물건을 나르든지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연락은 어디서 어떻게 받지? 별 쓸데없는 생각이 든다.
맹자에 보면 ‘성문 앞 수레바퀴 자국이 어떻게 말 두 마리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란 말인가?’라는 말이 있다. 오랜 세월 수많은 수레가 좁은 성문 앞을 똑같은 자국을 따라 지나다녀 깊게 파인 것이다. 원래는 사물의 원인을 잘못 유추해서 잘못된 결론에 도달한다는 비유인데 나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잘못된 일을 반복하며 살다 보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늘 하던 일이라고 여겨 만사를 그대로 따라 하고 편한 것만 찾아 매사를 임시변통으로 처리하는 것이 우리의 병폐다. 언제쯤 사고발생→위로 및 긴급대책→관계자 처벌→망각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을까?
새해부턴 이런 후진국형 사고의 종식(終熄)을 보아야 할 때다.
이인재 한국뉴욕주립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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