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승장, 용인 처인성서 몽골군 물리치다
그때 몽골군이 쳐들어와 주성(州城)을 포위한 지 70여일이 되어 식량이 떨어져 위태롭게 되었을 때, 병사들을 독려하기를 “만일 힘을 다하면 귀천 없이 모두 관작을 제수할 것이다”라 하고 마침내 관노(官奴)의 부적을 불사르고 노획한 소와 말을 나누어주니,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나가 싸워 적을 물리쳤다. 그 공으로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이 됐고, 그 밖에 군공을 세운 자들도 관노·백성 할 것 없이 모두 관작이 제수됐다.
1258년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었으나, 그 때 동북면은 이미 몽골군의 수중에 들어갔으므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1262년(원종 3)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예부상서가 되었으며, 이듬해 수사공 우복야(守司空右僕射)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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