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교육에 헌신한 여성 사회사업가
어려서 평양에 옮겨 살았다. 14세 때 가정을 이뤘다. 그러나 2년 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친정으로 돌아와 홀어머니를 모시고 온갖 궂은 삯일을 도맡아 하면서 재산을 모으기 시작했다.
어머니마저 여읜 뒤 더욱 근검절약하며 억척스러운 과수로 화장을 제대로 하는 일도 없이 불철주야 일을 하여 큰 돈을 모았다. 그 뒤 평양 근교의 광대한 황무지를 사들여 1900년대에 일본인에게 넘기면서 굴지의 평양 갑부가 됐다.
자선사업에 희사할 뜻을 굳혔다. 1908년 첫 공익사업으로 대동군에 돌다리로 새로 부설해 ‘백선교(白善橋)’라 이름하게 됐다.
1919년 3·1운동에 충격을 받고 1924년 모든 재산을 사회사업에 바치기로 공식발표한 뒤 당시 30만 원의 거금을 출연하여 평양 일대의 각급학교 지원의 육영사업과 시민들을 위한 문화시설로 대공회당(大公會堂)을 신축했다. 대동강 옆의 이 웅대한 석조건물은 ‘백선행기념관’이라 하여 평양의 명소로 지목됐다.
민족교육에 헌신하는 한편, 조만식과 뜻을 같이해 백선행기념관 재단법인을 설립하였다. 86세의 일기로 사망했으며 여성으로는 최초로 사회장이 엄수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