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성시 인천 완성… 신도시 품격 높이고 구도심에 활력”
최진용(70) 인천문화재단 대표는 흥이 있는 사람이다. 그를 만나 대화를 시작하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그는 술을 좋아한다. 5천명에 달하는 술친구가 그의 카톡에 담겨있다. 그러나 술보다는 공연관람을 더 즐기고 공연관람 보다는 책과 노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읽지도 않으면서 매일 몇권씩 책을 사는 책 마니아다. 5만권의 서적을 보유해 ‘장서소장가’ 기념패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책보다는 여행을 더 즐기고 여행보다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의 주변에는 늘 여러 친구들이 있다. 노소동락하며 그는 즐거운 삶을 산다.
문화예술담당 공직을 지내며 ‘한국영화정책의 흐름과 발전방향’(공저, 집문당 1993년) 등 책을 펴냈다.또 지방문화육성방안(1980년), 공연예술의 해외수출방안(2001년), 기술의 발전과 예술영역의 확장(2013년) 등 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대학에서 10년 이상 강의를 했다.
2010~2013년까지 의정부예술의전당 사장을 지냈다. 그를 몇차례 만나 지나온 삶과 인천에 온 이후의 근황을 인터뷰 했다.
Q 고교졸업 후 문화공보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A 육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는데 인천동산 중ㆍ고교를 졸업했다. 당시 가정형편상 대학진학이 어려워 졸업후 돈을 벌어서 대학에 가 볼까 했다. 노동현장에서 인부로 6개월여 일을 하다보니 너무 힘들고,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서울에서 세무서의 보조직을 얻어 일을 이어갔으나, 시험을 통해 제대로 취업을 하고 싶었다. 고졸로 시험을 볼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는데 모신문사에 기자시험을 보았다가 보기좋게 떨어졌다.
이번엔 KBS방송국 피디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국영방송국이므로 공무원시험을 봐야했다. 1년여간 공부해 국가직공무원 시험에 합격, 공보부 말단직원으로 공직을 시작하게 됐다. 면접 때 “방송국에 가서 프로듀스로 일하고 싶다”고 했더니 “최군은 일단 공보부에 가서 경력을 쌓은 후 방송쪽 일을 해라”고 했다.
그러나 행정을 시작한 후 담당업무가 너무 재미있었고 ‘피디로서 능력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결국 평생 피디 일은 못했다. 입사 후 건국대 야간대학을 다녔다.
Q 문학담당 공직에 있으면서 기억에 남는 일은.
A 군대에 3년을 꼬박 다녀온 후 복귀해 2년 동안 문화예술 중장기계획을 세우는 문화예술관실에서 문학행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서정주, 박목월, 김동리, 구상, 황순원, 이은상, 곽종원 선생님 등을 수시로 만날수 있었고, 그게 너무 신기했다. 주로 이런 분들은 문화공보부의 자문위원으로 자주 뵙게 되었고, 그 일이 너무 좋았다.
외람되게도 그분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분들 덕분에 직장 생활이 늘 행복했다. 말단 직원으로서 심부름을 많이 하게 되었는데, 그런 심부름이 너무 기뻤다. 후일 문학을 담당하지 않을 때도 수 십 년 간 그분들과 연락하며 만나는게 늘 좋았다.
대부분 부친뻘 되는 문학가들이셨다.구상선생님도 그 중 한 분 이었다. 구상 선생님은 “어이 친구”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김동리 선생님은 서예의 대가였는데 붓글씨를 써주기도 했다. 후에는 유종호 전 예술원회장, 젊은 이문열, 오정희 작가 등과도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Q 연극담당과 국립중앙극장장 시절은 어떠했나.
A 연극을 담당하면서 주중 1~2편, 주말 3~4편 등 매주 4~5편의 공연을 봤다. 그것은 40년 이상 지속되었다. 공연이 끝난 후 배우들과의 뒷풀이에 대부분 참석해, 그들과 밤늦도록 연극과 예술 전반에 걸쳐 토론했다. 예술 현장의 고충을 온몸으로 느끼며 일했다.
충무로5가에 최현배 선생님 아드님이 운영하던 정음사 낡은 5층 건물에 연극회관이 있었다. 연극회관은 천정도 낮고 연극공간으로는 부실해 “꼭 옮긴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마침내 지금 성공회 옆의 쎄실로 연극회관을 옮기고, 제1회 대한민국 연극제를 열게 됐다. 그 후에 직접 국장, 장관을 설득해서 마침내 동숭동 아르코예술극장을 1981년 4월 개관하게 됐다. 평생 가장 보람스러운 일이다.
1999년 국립중앙극장장 시절은 최악이었다. 당시는 IMF 경제위기로 직원 50%감축과 국립합창단등 해체 등에 대한 지침을 받고 많은 고심을 했다. 전속단체, 상주단체, 예술진흥회, 아르바이트 학생까지 900여명 이었다.
나는 ‘함께 가는 개혁’을 추진했다. 나에게 준 지침에 대해서는 “수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국립합창단을 없애라는 지시도 있었다. 그때 만약 국립합창단을 없앤다면 각 지방의 합창단이 모두 없어져야 할 판이었다. 결국 국립합창단, 발레단, 오페라 등은 법인화해 예술의 전당으로 이관해 살리고, 국립극장은 슬림화한 후 체질강화대책을 수립해 마무리했다.
Q 인생에서 기억에 남는 일들을 소개해 주실수 있는지.
A 삼성출판사 김종규 회장은 ‘한국 문화계의 마당발’ 혹은 ‘문화계의 대부’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는 분이다. 진정으로 예술인들을 사랑한다.
당시 일부 예술인들은 연극팜프렛, 전단 등을 인쇄할 자금조차 없었다. 1991년 어느날 “가난한 극단, 무용단,화가 등을 지원해 달라”며 김회장께 조심스럽게 도움을 청했더니 좋다고 하셨다. 그로부터 여러해 동안 많은 예술인들을 김회장에게 보냈고 두 말 않고 도와주셨다. 잊을 수 없는 일이다.
또, 1991년말 이어령 장관은 퇴임 직전에 저를 불러 “정부의 KS인 한글완성형 코드는 99.9%는 맞지만 없는 글자가 있다”며 “한글 KS를 100% 완벽한 조합형코드로 바꾸려니 돈이 2조원이나 들고 뾰족한 방법이 없어, 제2의 훈민정음인데 해결책이 없을까?”라고 했다.
고민끝에 이미 퇴직한 前 이상희 과학기술부장관을 찾아뵙고 의논했더니, “흥분되는 일이다”며 예산 한 푼 안 들이고 ‘완성형ㆍ조합형 복수지원’ 컴퓨터 선택방식으로 이 문제를 말끔이 해결해 주었다.
칸느, 베를린, 모스크바 등 국제영화제 한국대표단 및 개인적으로 참가한 것이 잊을 수 없다. 또 해외 40개국 1천200여개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둘러 본 일은 전시장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알게 해 주었다. 부인과 장인의 도움이 항상 컸다.
Q 인천의 문화 전망과 인천문화재단 대표로서 과제는.
A 인천은 국내에서 가장 경제성장 속도가 빠른 도시 중 하나이다.
송도신도시에서 발전하는 인천의 힘을 느꼈지만, 배다리와 동구 뒷골목에서는 쇠락하는 구도심의 쓸쓸함을 보았다.
문화는 신도시에 품격을 높이고 구도심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전체 시민들에게 문화가치를 통해 당당한 자부심을 선사 할 수 있다. 지금은 문화적 인프라나 수요자가 서울 등에 크게 못미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4~5년 후에는 인천의 문화적 잠재력이 폭발할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
시의 ‘문화성시(文化盛市) 인천’ 정책은 이러한 문화잠재력을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해 줄 것으로 믿는다. 문화·예술섬 프로젝트는 옹진군 북도면의 3개섬 신도에는 ‘만화의 섬’, 시도는 ‘음악의 섬’, 모도는 ‘조각의 섬’으로 기획하고 있다. 무의도는 ‘연극의 섬’으로 추진된다.
꼭 ‘문화기부 1위 도시 인천’ 달성을 해내겠다. 현재 180여명의 문화기부자를 500명 이상 늘이고 싶다, 이로써 3년 내에 2천명의 정기적인 문화기부자를 모시고자 한다. 물론 금액은 5천원부터 시작된다. 목표를 달성한다면 장래 인천문화의 든든한 토대가 될 것이다.
최근 배다리 헌책방, 동인천 대한서림 등 학창시절 추억이 깃든 서점을 찾았다. 학창시철 그렇게 커 보였던 대한서림은 너무 작게 느껴져 아쉬웠다. 시민들 사이에 책읽기와 독서토론 분위기를 전파하는 것도 문화재단의 일이라 생각한다.
대담=김신호 인천본사 부국장/ 정리=양광범기자
사진=장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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