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를 빛낸 역사 인물] 윤집(1606∼1637)

병자호란 때 화의 반대한 척화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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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남원. 조선 후기 문신. 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631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이듬해 설서가 되었다. 1636년 이조정랑·부교리를 거쳐 교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국왕과 조정 대신들이 남한산성으로 난을 피했으나 청병에게 산성이 포위되어 정세가 극히 불리하게 되었다. 최명길 등이 화의로 위기를 극복할 것을 주장했다. 

이때 최명길의 목을 벨 것을 청했으며, 최명길이 국왕의 뜻을 움직여 화친의 일을 성립시키고자 입대해 승지와 사관을 물리치도록 청하자 이를 규탄하는 극렬한 내용의 소를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국왕이 오직 사특한 의논만을 옹호하고 간사한 신하만을 의뢰하면 마침내 나라를 잃어버리고 만다고 경고했다.

 

화의 성립후, 청나라 측에서 척화론자의 처단을 주장하자 오달제와 더불어 소를 올려 자진해 척화론자로 나섰다. 북쪽으로 끌려갈 때도 조금도 절개를 굽히지 않아 청병이 오히려 감복해 존경했다고 한다. 청나라에서 고문과 회유 등으로 그의 뜻을 돌리려 했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항변하자 마침내 심양성 서문 밖에 끌려가 사형당했다. 오달제·홍익한과 더불어 삼학사라고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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