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반 혐의로 처형된 비운의 무장
1467년 명을 받아 포천 등지에서 도적을 토벌했고,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에 참가했다. 1468년에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했으며, 이어 병조판서에 발탁됐다.
그러나 신숙주·한명회 등 원상 세력에 의해 구성군·강순 등 이시애의 난 평정으로 등장한 신 세력이 제거될 때 강희맹이 한계희에게 남이의 사람됨이 군사를 장악하기에 마땅치 않다고 말한 것을, 예종이 알아 해직됐다.
그가 숙직을 하고 있던 중 혜성이 나타나자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라고 말했는데, 이를 엿들은 병조참지 유자광이 역모를 꾀한다고 모함해 능지처사당했다.
그 뒤 1818년 우의정 남공철의 주청으로 강순과 함께 관직이 복구됐다. 어릴 때 권람의 딸이 귀신의 장난으로 죽게된 것을 남이가 귀신을 물리치고 살려준 것이 인연이 돼그녀를 아내로 맞았다는 일화가 있다. 묘는 화성시 비봉면에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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