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론이 지배하던 시대에 남인의 영수로서 정조의 탕평에 참여했던 인물, 바로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다. 정조의 충직한 신하로서 수원화성을 쌓고 신해통공 조치를 했다는 점을 그의 업적으로 꼽을 수 있다. 채제공이 정조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던 데는 그가 사도세자를 보호하려 애썼던 사실도 큰 작용을 했을 것이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 의해 죽은 정조의 아버지였다.
채제공은 일찍이 24세에 과거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39세 때(무인년, 1758, 영조 34) 가을이었다. 도승지였던 채제공이 새벽에 출근해 보니, 밤새 승정원으로 비망기가 하달되었다. 비망기의 내용은 놀랍게도 세자를 폐한다는 하교였다. 채제공은 비망기를 들고 영조를 찾아갔다. 비망기를 올리면서 어명을 거둘 것을 울면서 아뢰었다. 임금이 화를 내자 더욱 격렬한 어조로 매달렸다. 마침내 임금이 진정하고 일을 중지시켰다.
이후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에 분위기가 위태로울 때 채제공은 사도세자 보호에 진력했다. 즉위 초기에 채제공을 불러 치하했다.
“영조 임금께서 일찍이 내 손을 잡고 깨우쳐 주시기를 ‘나와 너로 하여금 부자(父子)의 은혜를 온전하게 한 사람은 채체공이다. 나에게는 순신(純臣)이요 너에게는 충신(忠臣)이니, 너는 이것을 알라’고 하셨다.”
이상은 다산 정약용이 쓴 ‘번옹유사(樊翁遺事)’에 나온 이야기다. 이런 연고로 정조가 채제공을 신뢰했다. 탕평정치를 추진하던 정조는 마침내 정조 12년(1788)에 세 정승을 노론, 소론, 남인으로 구성했다. 정조의 야심찬 탕평 조정이었다. 이때 정조가 친필로 69세의 채제공을 우의정에 임명했다. 이듬해 사도세자 묘를 배봉산에서 수원의 화산으로 옮길 때 채제공에게 책임을 맡겼다. 채제공은 사도세자의 새 묘소인 현륭원을 조성하는 공사의 총리사가 되었다.
현륭원 조성에 이어 수원 유수로 부임했다. 정조 17년(1793) 정월이었다. 그런데 5월에 영의정으로 임명되자 사직소를 올려 사도세자 관련자 처벌을 주장하여 일대 정치적 파란을 일으켰다. 그해 12월 6일 정조가 채제공 등을 불렀다.
“수원의 성 쌓는 일을 경이 그곳 유수로 있을 때 처리한 바가 있었는데, 중간에 정승으로 임명하여 중지하고 말았다. 내 생각엔 10년 정도면 완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감독으로 적임자를 얻으면 어찌 꼭 10년까지 끌겠는가?” 이렇게 말하면서 소요 경비와 조달에 관해 의견을 구했다. 그리고는 채제공에게 “이 일은 중대하여 대신이 총괄하여 살피지 않을 수 없는데, 경밖에 적임자가 없소!”
수원화성은 이듬해(1794) 1월에 공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무더위와 추위가 심한 때 중지하기도 해서 병진년(1796) 9월 공사를 마쳤다. 예상보다 빠른 완성이었다. 실학정신을 엿볼 수 있는 수원화성은 정조의 꿈이 서린 곳이고, 정약용의 성설이 반영된 것이지만, 신도시 기반 조성을 위한 노력과 치밀한 축성 계획으로 책임감 있게 추진한 사람이 바로 채제공이었다. 공사가 끝난 후 대호피를 상으로 준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한편, 채제공은 정조 14년에 좌의정에 임명되어 3년간 홀로 정승으로 있었다. 이른바 독상체제였다. 정조 15년, 채제공이 정조에게 아뢰었다. “도성 백성의 고통을 말한다면, 도고(都庫)가 가장 심합니다. 우리나라의 난전을 금하는 법은 오로지 육전이 위로 나라 일에 응하고서 이익을 독차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근래 노는 무뢰배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스스로 전호(廛號)를 짓고 일용품에 관계되는 것은 주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크게는 말이나 배에 싣는 물건부터 작게는 머리에 이고 손에 드는 물건까지 사람이 다니는 길목에 숨어 있다 헐값으로 강제로 사들입니다. 물건 주인이 혹 불응하면 돌연 난전이라 칭하며 결박하여 형조와 한성부에 바칩니다.”
이렇게 금난권을 오용하여 물건 주인에게 헐값으로 억지로 사들이고, 물건이 꼭 필요한 소비자에겐 지나치게 비싼 가격으로 파는 것이었다. 채제공은 이런 독점권을 제거하여 자유로운 상거래를 보장하고자 했다. 결국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을 없애기로 했다.
신해통공 조치였다(1791). 처음엔 이에 대한 원망과 저주가 벌떼같이 일어났다. 백성들조차 법령이 불편하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1년쯤 지나자 평판이 좋아졌다고, 정약용은 ‘번암유사’에서 전했다. “1년쯤 지나서 물화(物貨)가 모여들어 일용품이 날마다 넉넉해지니 백성들은 크게 기뻐하여, 비록 전에 원망하고 저주하던 자들일지라도 채제공의 주장이 훌륭했다고 말했다.”
천주교가 남인계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남인계 젊은이들의 학문적 지도자 구실을 하고 있었던 성호 이익이 한역서학서를 통해 서양의 과학기술을 높이 평가하고, 천주교에 대해서는 보유론적 관점에서 비판을 하면서 일부 수용하기도 했다. 이 천주교가 조정에서 문제가 되었다. 채제공은 정조에게 천주교가 불교의 별파라고 설명했다.
정조는 이 문제의 정치적 폭발성을 인지했다. 그리하여 정치쟁점화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문제는 점차 심각해졌다. 윤치충 권상연 등이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폐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문제화되었다. 이른바 진산사건이다.
이 사건을 통해 남인계 내에서도 서학을 신봉하는 신서파와 이를 공격하는 공서파로 대립이 형성되었다. 정조는 이 문제를 채제공에게 맡기어 통제하고자 했다. 천주교를 비판하고 확산을 억제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문제가 정치적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았다.
노대신 채제공은 79세에 물러났다. 그리고 해를 넘겨 정월에 세상을 떴다(1799). 의지할 인재를 잃은 정조는 매우 슬퍼했다. 그의 빈자리가 컸던지 이듬해 정조가 갑자기 죽음으로써 상황은 일변했다(1800, 정조 24년). 정조의 국상을 마친 이듬해, 정순왕후는 척사 하교를 내려 대대적으로 천주교도를 탄압했다. 이른바 신유사옥이었다.
여기서 채제공 세력이 주요 타깃이 되었다. 모두 천주교도로 몰려 죽거나 유배에 처해졌다. 정작 천주교의 확산을 막고자 했던 채제공은 사학의 뿌리라는 낙인이 찍힌 채 관직을 추탈당하기에 이르렀다.
채제공은 열악한 정치세력이었던 남인의 지도자로서 상당한 역할을 해냈다. 남인계 실학자들은 대부분 그의 정치적 보호 속에 성장했다. 정조 탕평의 한 축을 이뤘으며 실학의 보호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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