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를 빛낸 역사인물] 김육(1580~1658)

조선 최고의 조세개혁을 이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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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실학자. 1605년(선조 38)에 성균관으로 들어갔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하자 의금부도사에 임명됐다. 1638년 6월에 충청도관찰사에 올랐다. 도정(道政)에 임해 대동법의 시행을 건의하는 한편, 수차(물레방아)를 만들어 보급했으며, <구황촬요>와 <벽온방> 등을 편찬, 간행하다가 승정원좌부승지가 됐다.

 

이후 여러 현직(顯職)을 지내면서 중국에 두 차례나 더 다녀왔다. 그 과정에서 화폐의 주조·유통, 수레의 제조·보급 및 시헌력(時憲曆)의 제정·시행 등에 착안하고 노력했다. 1649년 5월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대사헌이 되고 이어서 9월에 우의정이 되자, 대동법의 확장 시행에 적극 노력했다.

 

71세의 늙은 몸을 무릅쓰고 중국에 다녀온 뒤, 잠시 향리에 머무르다가 이듬해 1월에 영의정에 임명됐다. 아울러 민간에 주전(鑄錢)을 허용하는 일도 성공했다. 대동법 실시를 한층 확대하고자 효종에게 건의하던 중 죽었다.

 

다양한 저술 활동을 했다. 저술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직접 활자를 제작하고 인쇄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사업은 자손 대까지 하나의 가업으로 계승돼 주자(鑄字)와 인쇄 사업에 크게 기여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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