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변호사 개업을 거부한 ‘대쪽 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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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의 법무장교는 1967년 5월 베트남 전선에서의 복무를 마치고 귀국 길에 올랐다. 몇 시간 후 마침내 그리던 조국 땅이 하늘 아래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록이 아름다워야 할 5월의 산천이 황무지가 아닌가. 그때만 해도 우리 산에는 나무가 없어 그렇게 황량할 정도였다. 그는 결심했다. “내 조국을 푸르게 만들겠다”고.

 

그래서 평검사로 있을 때나 검찰 고위직에 있을 때도 틈만 나면 충남 논산 양촌에 마련해 둔 벌거숭이 산에 나무를 심었다. 그렇다고 검사로서의 직분에 소홀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쪽 검사’로 이름을 날렸고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대검차장, 장관급의 법제처장 등을 역임하면서 선후배 검사들로부터 높은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1998년 법제처장을 끝으로 퇴임할 때 여러 로펌에서 서로 영입하려고 했으나 그는 단호히 변호사 개업을 거절했다. 화려한 간판과 인맥으로 ‘전관예우’의 황금어장과 같은 조건을 가졌음에도 그는 ‘돈벌이에 후배를 이용하는 선배가 되지 않겠다’며 거절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말도 했다. “검사는 명예를 먹고 살지 돈 버는 직업은 아니야. 곁불 쬐는 검사는 그만둬야지.”

 

지금 송종의 씨는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벌거숭이산을 가꾸어 만든 시골 밤나무 농장에서 건강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농장 수익금을 모아 ‘천고법치문화재단’을 설립, 국가의 법질서 확립에 기여한 사람을 발굴해 시상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요즘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김영란법’의 주인공 김영란 전 대법관도 비슷한 경우다. 대법관을 퇴임하면 그야말로 전관예우 최고의 조건이다. 그러나 그 역시 변호사 개업을 포기했다.

특히 김영란 전 대법관은 서울법대 재학 중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최초의 여성 대법관에다 ‘소수자의 대법관’으로 불릴 만큼 사법 정의에 투철하여 세인의 관심이 높았다. 변호사 개업만 하면 높은 수임료를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아예 김재형, 박상옥 대법관처럼 국회 청문회 단계에서 퇴임 후 변호사 개업을 않겠다고 다짐한 법조인도 있다.

 

지난주,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 사건에 100억원의 부당 수임료를 받은 혐의로 기소된 부장판사 출신의 최유정 변호사가 징역 6년의 실형을 선고받아 큰 뉴스가 되었다. 잘 나가던 최변호사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돈의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인생을 통째로 던져버린 것이다.

 

공안 검사로 이름을 떨치던 홍만표 전 검사장 역시 돈의 유혹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들 모두는 자신의 손으로 교도소에 집어넣던 사람들과 함께 수의(囚衣)를 입고 영어의 몸이 되는 기막힌 인생 역전을 겪어야 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도 많은 법조비리에 공분을 느끼며 살아왔다. 그 가장 큰 적폐로 흔히들 ‘전관예우’, 검찰의 수사권ㆍ기소권 독점, 그리고 너무 큰 법원의 재량권 등을 지적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문제가 아니다. 모두들 그 당위성은 인정하지만 실제 개혁의 칼을 빼들었을 때는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 기득권이라는 방어벽을 허물기가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눈에 보이는 제도의 개혁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의식의 개혁이다. 대법관을 지내고도 변호사 개업을 거부하고 ‘곁불 쬐는 검사ㆍ판사’는 옷을 벗어야 하며 ‘후배를 돈벌이에 이용하지 않겠다’는 그런 의식! 그런 변화의 바람이 법조계에서 일어나길 기대한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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