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중심에서 정치·경제·문화 이끌다
현재 경기도는 1천년을 맞아 다양한 학술제와 기념행사 등을 기획하고 있으며 ‘경기 천년’ 기념행사를 통해 경기도민들로 하여금 애향심을 불러일으키고 지역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도는 아직 어떻게 준비하면 도민들과 소통하고 지속 가능한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를 놓고 고민 중이다. 이에 본보는 올해 130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일본 고마군을 찾아가 이들이 준비한 1300주년 기념행사를 조명해 보고, 경기 천년 기념행사의 올바른 방향을 찾아보고자 한다.
오는 2018년 맞이하는 ‘경기 천년’은 고려 현종 9년인 1018년 수도의 외곽지역을 정식으로 ‘경기’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을 기준으로 삼고있다.
그렇다면 ‘경기’라는 단어의 기원은 무엇일까.
본래 ‘경기’라는 단어 중 ‘경’은 천자의 도읍을, ‘기’는 천자가 직접 관할하던 도성 주위 1천리의 땅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기제는 당나라가 북제 이래 지방의 고을을 9등급으로 나누어 다스렸던 제도를 적·기·망·긴·상·중·하의 7등급 제도로 고쳐서 도성 안 혹은 경도가 다스리는 곳을 경현(또는 적현)으로, 도성 밖 주변지역은 기현으로 구분해 이들을 천자가 거주하는 3경에 두고 특별지역으로 통치하던 데서 비롯했다.
이러한 ‘경기’가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등장한 것은 고려시대다『. 고려사』권56 지 10 지리 1 왕경개성부, 현종 9년을 보면 1018년 현종은 “개성부를 없애고 개성현령을 두어 정주·덕수·강음 등 3현을 관할하게 하고, 또 장단현령이 송림·임진·토산·임강·적성·파평·마전 등 7현을 관할하게 하여 모두 상서도성에 직속시켰는데, 이를 경기라 하였다”고 나타나 있다.
경기제가 중앙에서 분리돼 지방제도로 자리 잡은 것은 고려 후기‘경기좌·우도’의 성립이었다.
1360년(공민왕 9) 경기병마도통사를 둔 것을 시작으로 왜구의 방어와 관련된 병마직이 설치되는 과정을 통해 경기가 차츰 좌·우도로 구분되어 갔고, 1388년(우왕 14) 경기좌·우도에 찰방 겸 제창고전민사를 나누어 보냄으로써 점차 행정기구화 됐다.
경기가 도로 확립된 것은 1390년(공양왕 2)으로 경기를 확장해 좌도와 우도로 나누고 각기 도관찰출척사를 둔 때부터다. 경기도는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점차 지금의 모습을 보이게 된다.
조선 초기인 1402년 태종은 경기좌ㆍ우도를 합쳐 경기좌우도성이라 하고 관찰사와 도사를 뒀다. 1413년(태종 13)에는 다시 사방의 거리를 참작해 연안ㆍ배천ㆍ우봉ㆍ강음ㆍ토산을 황해도에 이속시키고 이천을 강원도에 귀속시킨 대신 충청도의 여흥ㆍ안성ㆍ양지ㆍ음죽과 강원도의 가평현을 내속시킨 다음 1414년(태종 14) 1월18일 관제를 고치면서 경기를 좌ㆍ우도로 나누지 않고 그냥 ‘경기도’라 부르도록 했다.
이러한 1414년을 기념하기 위해 도는 지난 2014년을 ‘경기도 600년’으로 기념하고 각종 행사를 개최한 바 있다.
지난 2014년 경기문화재단이 ‘경기도 600년’을 맞아 출간한 ‘육백년 경기도’를 보면 경기도는 조선시대 경제중심지 역할을 했음을 알수 있다. 17세기 이후 경기도는 한양을 소비시장으로 무와 가지, 오이, 수박 등의 품종이 활발하게 판매되었고 이천의 쌀도 한양의 대갓집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18세기 들어서는 강화의 화문석과 안성유기 등 수공업이 점차 발전해 상품화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수공업의 발전은 18세기 중엽에는 도내에 사평ㆍ광진ㆍ누원ㆍ검안 등 101개의 5일장이 개설되는 등 시장이 발달했다.
이처럼 상업이 발전하면서 한양의 배후도시인 수원 등이 상업도시로 발전했으며 광주와 양주 등도 유통거점으로 성장했다. 경기도는 경제뿐만 아니라 한반도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지리서인 ‘택리지’는 경기도에 대해 “300년 동안이나 명성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유풍이 크게 떨치고 학자가 무리 지어 나왔으니 엄연한 하나의 작은 중화였다”며 우리나라 학문의 중심지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실제 조선사회를 지배했던 성리학은 16세기 이후 이황의 영남학파와 이이의 기호학파가 이끌어갔는데, 주로 경기지방을 중심으로 충청ㆍ전라도 사림들로 형성된 학파이다.
조선후기 성리학이 한계에 부딪히자 급부상한 ‘실학’ 역시 서울과 남한강을 따라 경기도를 중심으로 형성된 개혁적인 학자들에 의해 주도됐다. 성호 이익은 안산에 거주하면서 제자를 길러 성호학파를 형성했으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은 경기도 광주 출신이다.
경기도는 천주교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광주 천진암과 여주 주어사가 천주교의 발생지로 꼽히고 있으며 한국 천주교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는 용인 골배마실을 본거지로 안성 미리내와 광주ㆍ이천 일대에서 활발하게 전교활동을 펼쳤다.
■ 천년의 역사 속 빛나는 경기도 인물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경기도. 경기도를 빛낸 역사 속 인물은 누가 있을까.
가장 먼저 수원을 상징하는 인물과도 같은 정조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조선 22대 왕인 정조는 수원화성을 건립했으며 현재 화성에 묘소가 있다. 또 조선왕조의 근간을 만들었다고 평가받고 있는 정도전도 꼽힌다. 고려말 조선 초기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삼봉 정도전은 평택에 불천위를 봉안한 문헌사와 기념관이 있다.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 역시 남양주에 묘소와 생가, 기념관 등 유적지가 있다.
고려 말과 조선 초기 문신인 황희 역시 경기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재상으로 꼽히는 황희는 영의정 18년, 우의정 1년, 좌의정 5년 등 총 24년간 정승의 자리에 있었다. 대쪽같고 강직한 성품으로 알려진 황희의 묘소와 신도비가 파주에 있으며 반구정에 영정이 봉안됐다.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율곡 이이도 파주에 묘소가 있으며 조선 후기의 문신인 채제공의 요소는 용인에 있다.
조선중기의 명장인 권율의 묘소는 양주에 있으며 고양에는 행주대첩비가 남아있다.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위정척사파의 중심인물인 최익현은 포천에서 태어났다. 최익현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상소를 올리고 국내외에 조약의 무효를 선포할 것과 여기에 가담한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문화ㆍ예술 분야에도 뛰어난 경기도 인물이 많다. 홍길동전의 저자로 유명한 조선 중기 문인이자 정치가인 허균의 묘소는 용인에 있으며 조선후기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는 과천에 추사박물관과 과지초당이 있다.
경기도를 빛낸 인물 중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독립운동가 역시 많은데 신한청년단과 건국동맹 등을 결성했던 여운형은 양평이 출생지로 현재 생가와 기념관이 양평에 마련돼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인 조소앙 역시 경기도 파주 출생이다. 해방 후 임시정부의 법통 고수를 주장했고 남북협상에 실패한 이후에는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한 조소앙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되기도 했다.
경기도를 대표하는 여성에는 명성황후와 나혜석을 꼽을 수 있다.
조선 고종의 정비이자 순종의 어머니인 명성황후는 여주에 생가와 기념관이 있으며 1900년대 초 화가이자 작가, 시인, 조각가,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 등으로 활동하며 신여성의 상징으로 불리는 나혜석은 수원 출생이다.
이호준기자
※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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