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는 대형 청사진이 가득했습니다. 그 속에 파묻혀 지냈습니다. 틈나면 도청을 오가며 동의를 구했습니다. 시의회에 불려나가 특혜가 아님을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기를 1년여,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집니다. 그가 과로로 쓰러졌습니다. 일에 치어 방치했던 혈압이 문제였습니다. 목숨은 건졌지만 한쪽 팔과 다리의 장애가 남았습니다. 결국, 공직을 떠났습니다. 깨끗하고 능력 있던 한 공무원의 쓸쓸한 퇴임이었습니다.
안수현이라는 공무원도 있었습니다. 2000년대 초 경기도청 공보계장을 했습니다. 돌아보면 전형적인 구(舊)시대 공무원이었습니다. 오전 회의가 끝나면 기자실에 들어옵니다. 딱히 업무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기자들의 말동무가 일입니다. 말이 말동무지 기자들이 좀 까탈스럽나요. 말도 안 되는 투정, 위아래 몰라보는 막말이 쏟아집니다. 그래도 그가 웃으면서 던지는 한 마디는 이거였습니다. “에이, 밥이나 먹으러 가.”
기자들과 몸으로 부딪혔습니다. 기자들이 주는 소주잔-때로는 고량주-을 거절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하룻밤에 두세 자리를 옮겨 다니는 것도 다반사였습니다. 안 계장의 그런 모습을 기자들도 도지사도 좋아했습니다. 나중에 승진도 했고 기관장도 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재작년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출장 갔던 중국에서 고인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를 괴롭히던 기자의 핸드폰엔 지금도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010-3739-34○○.
이제 이 국장의 동기들, 안 계장의 동기들도 다 떠났습니다. 이 국장보다는 10년쯤 더 했고, 안 계장보다도 2년쯤 더 했습니다. 그래서 남들은 행복한 퇴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들도 정말 행복하다며 떠났을까요. 평생 근무한 사무실을 나가는데 행복했을까요. 그렇치 않을 겁니다. 누구에게나 떠나는 건 허전하고 슬픈 일입니다. 그 허전함과 슬픔이 몇 년 더 했느냐 몇 달 늦었느냐로 위로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제는 ‘강 검사장’이 사표를 냈다고 합니다. 23년쯤 검사 생활을 했다고 하네요.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 배정 사건, BBK 주가 조작 사건, 삼성 비자금 특검, 노무현 대통령 수사 당시 대검찰청 범죄정보기획관 등으로 그의 이름이 남았습니다. 같은 검찰 식구를 구속했던 그랜저 검사 사건도 그가 했습니다. 독하게 살았던 23년으로 보입니다. 그런 그에게 기자들은 늘 ‘18기 선두주자’라는 형용사를 달았드랬습니다.
그런 그도 사표를 냈다고 합니다. 행복할까요. 퇴임사에서 뭐라고 할까요. ‘그동안 감사했고 보람 있었습니다. 후배들의 건투를 빌며 행복하게 떠납니다’라고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하기는 떠나는 공직자가 이것 말고 할 말이 뭐 있겠나 싶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한 번 물어볼까 합니다. ‘정말 행복한가요. 정말 미련은 없나요.’
겨울입니다. 인사철입니다. 또 사람들이 떠날 겁니다. 또 다른 이 국장들, 또 다른 안 계장들, 또 다른 강 검사장들이 떠날 겁니다. 하필 그 계절이 우리나라엔 차디찬 겨울입니다.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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