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칼럼] 유엔 총장 반기문·한국 대통령 반기문

김종구 논설실장 kimjg@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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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아름다운 전쟁이란 없다. 고귀한 목숨을 빼앗는 집단의 광기(狂氣)일 뿐이다. 태평양 전쟁은 그중에도 잔혹했다. 어림잡아 1천900만명의 아시아인이 죽었다. 중국은 1천만명의 국민을 잃었다. 필리핀(111만명)ㆍ타이완(3만명)ㆍ말레이시아ㆍ싱가포르(10만명)의 희생도 컸다. 그 속엔 20만명의 죄 없는 조선인도 있다. 가해자이자 전범국인 일본은 어땠나. 군인과 군속 230만명을 비롯해 310만명이 사망했다.

전쟁은 그렇게 모두를 죽이는 행위다. 9월 3일은 태평양 전쟁이 끝난 날이다. 이를 ‘승전일’이라고 명명한 중국이 축제를 벌였다. 무시무시한 무기로 톈안먼 광장을 채웠다. 그 자리에 각국 원수들을 불러 모았다. 박근혜 대통령도 거기 있었다. 누가 봐도 경제력을 앞세운 과시용 행사다. 몇 세기 전에 봤던 ‘떼국’-대국(大國)-의 오만함까지 얼비쳤다. 섬뜩했던 그날의 열병식을 축제라 여긴 세계인은 아무도 없다.

이런 전쟁을 막는 것이 유엔이다. 헌장 전문에 그 목적이 명시돼 있다. ‘…두 번이나 말할 수 없는 슬픔을…인간의 존엄과 가치…무력을 사용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두 차례 세계 대전에 대한 참회가 있고, 인간 존엄에 대한 선언이 있고, 무력을 쓰지 않겠다는 약속이 있다. 이 헌장에 손을 얹고 취임한 이가 반기문 사무총장이다. 그랬던 반 총장이 열병식엘 갔다. 무기를 자랑하고, 세계를 협박하는 곳엘 갔다.

유엔 총장의 일은 평화 수호다. 다그 함마르셸드 총장(2대ㆍ스웨덴ㆍ1953~1961)을 역대 최고로 친다. 그도 중국에 갔었다. 억류된 미 정찰기 승무원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미국과 중국이 한국전쟁에서 충돌하던 때다. 그 국제적 공백에 뛰어들어 인질을 구출해냈다. 콩고 분쟁 지역으로 이동하다가 추락한 비행기가 그의 마지막 사무실이었다. 최초의 사후(死後) 노벨상이 수여됐다. 반 총장과는 달라도 많이 다르다.

덩달아 우리 입장만 고약해졌다. 일본이 모처럼 칼자루를 쥐었다. 반 총장의 열병식 참석을 보름 넘게 물고 늘어진다. 반 총장의 행동과 한국 국민의 자존심을 싸잡는 발언까지 나온다. “UN 사무총장을 맡을만한 국가가 아니었다는 것을 국제사회가 간파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베 총리의 측근이라는 하기우다 자민당 특보의 말이다. 아마도 이번만큼은 국제 사회에서 자신들의 논리가 우위에 있다는 확신이 선 모양이다.

툭하면 우리 심기를 건드리던 일본이다. 위안부는 없었다고도 했고, 독도가 저네들 땅이라고도 했다. 그때마다 우리가 반박할 단어는 간단했다. ‘위안부 망언’ ‘독도 도발’이라고 하면 끝났다. 그런데 이번 ‘반기문 비난’은 다르다. 유엔 총장의 전쟁 파티 참석이 적절치 않은 게 사실이다. 패전국 일본이 불공정에 대한 유감을 표하는 것도 당연하다. 무수했던 일본의 도발 중에 이번처럼 우리가 할 말 없어 보기도 처음이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적어도 며칠 전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요즘 국내 정치가 그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반 총장이 대통령이 된단다. 친박(親朴) 쪽 후보로 그가 상정됐다고 한다. ‘반기문 대통령(外治)- 친박 총리(內治)’라는 구상까지 나돈다. “열병식 참석도 박 대통령을 위해서였다”는 ‘확신’도 나온다. 앞의 것은 대통령의 현재 측근-윤상현-이, 뒤의 것은 대통령의 과거 측근-이상돈-이 흘린 ‘설’이다. 반기문 신당을 만든다는 얘기도 있다. 그 사이 여론조사 맨 위에 그의 이름이 올랐다. 열병식 보름 만에 조성된 환경이다.

그렇게 보면 성공한 열병식 참석으로도 보인다. 시진핑, 푸틴과 나란히 서서 국제적 중량감을 과시했다. 때마침 유엔 총회도 시작됐다. 이번엔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설 차례다. 외치를 담당할 대통령 후보에겐 더 없는 사진첩들이다. 유엔 정신을 저버리고 참석했던 중국 전승절 열병식이 대통령 후보 반기문으로선 최고의 대선 출정식이 된 셈이다. 바야흐로 세계의 대통령에서 한국의 대통령으로 옮겨오는 과정인가.

그런데 말이다. 대통령이 안 되면 어찌 되는 건가. 괜히 사심(私心)에 매여 전쟁 파티나 따라다닌 총장이 되는 건 아닌가. 괜히 한국인의 유엔 총장 자질에 상처만 준 총장이 되는 건 아닌가. 괜히 9년 전 모두의 지지에서 절반의 지지로 내몰리는 총장이 되는 건 아닌가. 한국 정치는 늘 유력자를 흡수한 뒤 폐기해 버렸다. 그 습성을 알기에 따라붙는 걱정이다. 총장 임기는 1년밖에 안 남았고, 대통령 선거는 2년이나 남았는데….

유엔 총장의 열병식 참석은 잘못이다. 이를 항의하는 일본의 주장이 옳다. 반 총장은 그 때 거기 있지 말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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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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