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14세기 페스트, 21세기 메르스

검역을 뜻하는 영어 단어 ‘quarantine’은 14세기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페스트’에서 유래됐다. 당시 유럽인구 3분의 1의 목숨을 앗아갔던 ‘흑사병’이 돌기 시작하면 당국은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도시를 바둑판처럼 분할해 시민들의 이동을 막았다. 여기에서 ‘40일간의 격리’를 의미하는 ‘검역’이라는 단어가 파생됐다.

당국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감독관을 파견해 ‘구획된 거리’를 하루 두 번씩 돌며 집집마다 거주자의 이름을 호명하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이름이 불린 주민이 창문 앞에 나타나면 ‘살아있음’을 의미하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위험한 징조’로 간주됐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메르스를 대처하는 방식을 보면서 14세기 유럽의 페스트 대응방식을 보고 있다는 데자뷰(기시감ㆍ旣視感)를 느낀다면 지나친 비판일까? 이번 메르스 사태에서 정부의 초동대응은 완전무능 그 자체였다.

민간 연구기관에서 6개월 전 메르스 대유행을 경고했지만 귀담아듣지 않았다. 5월20일 최초의 확진자가 나온 후 12일이 지나서야 정부의 공식 대응책이 나왔으며(6월2일), 환자발생 병원에 대한 정보는 17일이 지나서야 여론에 떠밀려 발표(6월7일)됐다.

그마저도 병원 정보가 정확하지 않아 국민의 공분을 일으켰다. 메르스 대응체계도 보건복지부, 국민안전처, 청와대가 따로 놀면서 신속하고 유기적인 협조체계가 구축되지 못했다.

오죽하면 “무능한 정부가 메르스보다 무섭다”는 말이 나왔겠는가? 메르스가 진정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고 하지만 섣부른 예단은 아직 이르다.

우리나라는 사우디에 이어 메르스 환자가 두 번째로 많은 국가가 됐다. 외국이 2012년부터 발병한 숫자임을 고려하면, 최단기간에 가장 많은 환자가 발생한 것이다. 정부의 재난위기관리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은 미국과 비교해보면 극명히 드러난다.

미국은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2013년 ‘메르스 매뉴얼’을 만들어 사전 배포해, 작년 2명의 환자가 발생했을 때 비행기 탑승객 등과 연락해 감염 여부를 신속히 판단하는 등 완벽한 초동대처를 해냈다. 일본도 2013년에 메르스를 ‘지정감염병’으로 정하고 관리대응 매뉴얼을 제작해 자치단체와 병원에 배포했다. 지구촌이 하나의 동네로 연결된 지 오래다.

메르스, 사스, 에볼라 같은 ‘제3의 감염병’이라는 불청객이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선진국과 같은 위기대응센터(Emergency Operation Center)를 만들어 초기에 진화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닥칠 수 있는 위기상황, 대응조직, 인력동원 계획 등에 대한 시나리오를 만들어서 훈련해야 한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것은 국가의 기본임무이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를 겪고도 바뀐 게 없다는 자괴감을 금할 수 없다. 지금이라도 국가경영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국내 전체 역학조사관이 34명, 그 중 32명이 군 복무 중인 공중보건의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감염병에 대한 전문인력을 육성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끝으로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메르스와의 전쟁 최일선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 의료인들의 노고에 깊이 머리 숙여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김진표 민주당 前 원내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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