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주도하는 AIIB(아시아 개발 투자 은행)에 대해 우리 정부가 참여를 결정했다. 이 소식을 접하고 안중근 의사의 동양 평화론을 생각했다. 여순 옥방 찬 자리에서 안 의사는 동양 평화론를 집필하다 미완으로 그쳤다.
동양 평화론의 주요 내용은 한ㆍ중ㆍ일 3국 간의 상설기구 동양평화회의를 여순에 조직하고 여타 아시아 국가가 참여하는 회의로 발전시키고 동북아 3국 공동 은행 설립, 동북아 3국 공동 평화군 창설 등의 구상도 밝혀 유럽연합(EU)의 원조로서 100년이라는 시차가 있으며 오늘날 아시아 개발 투자 은행 설립의 이론적 근거였다.
1909년 3월26일 독립항쟁 하얼빈 전투 현장에서는 세발의 총성이 올렸다. 30분 후 이등 박문이 열차 안으로 옮겨져 두 의사에게 응급처치를 받았다. 그러나 폐 속에 3발이나 박힌 실탄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따라준 위스키 한잔을 마시고 절명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안 응칠 장군은 명사수였다. ‘나는 대한 의군 참모 중장으로 동양 평화를 어지럽힌 이등을 포살할 계획이었다.
나를 자객(테러리스트)으로 몰지 말고 국제 공법에 의해 포로로 예우하라’. 그리고 1899년 맺은 ‘한 청 통상조약에 의해 나를 대한제국으로 인도하라’ 고 주장했다. 일제는 끝까지 이런 주장은 고려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마선생 안 응칠 장군은 1879년 음력 7월16일. 황해도 해주의 수양산 아래에서 태어났다. 이름을 중근이라고 했다. 그리고 7살 때 신천 청학동으로 이전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북에서는 안 의사의 유지를 계승하는 적장자로 보고 있으며 김일성은 남쪽에 앞서 유해를 찾아 나섰다 한다.
드물게도 남북이 동시에 존경하는 인물이며 통일의 표상적 인물인 것이다. 그러나 남북 어디에서도 일제의 국제 공법 위반에 대해 항의하거나 국제 사법법원에 제소하는 시도도 없었다.
그의 위대성은 명사수보다는 평화주의자이며 살생유택을 실천한 실천 선비인이다. 7연발 중 3발은 이등 이외도 나머지 3발도 왜소인(矮小人)을 쐈다. 그리고 한발을 남겼다. 자살용이냐고 물었을 때 목표를 달성한 것 같아 더이상의 살생이 불필요했다고 말했다. 절대 절명의 순간에도 살생유택의 교훈을 실천한 것이다. 우리들은 이를 세속 5계라 부르며 인도주의의 정점으로 친다.
이제 남북은 출생지 해주나 성장지 신천에서 안 응칠 장군을 기리는 국제 사격대회를 동시에 개최하면 어떨까? AIIB 자금에 의해 경의선과 고속도로를 보수하고 사리원에서 신천, 개성에서 해주를 잇는 인프라를 조성, 통행과 유숙의 편의가 제공된다면 남북학생들의 순례 코스가 가능할 것이다. 안의사가 꿈꿨던 동양평화의 염원은 태생지 해주에서 순절지 여순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리고 안의사가 구상한 동북아 공동 3국 은행은 AIIB 은행 구상의 원조이다. 여순에 본부를 두고 일본을 끌어들여야 하며 별칭으로는 ‘안 중근 은행’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주 은래 수상은 1963 조, 중 역사 대담에서 ‘안의사는 한중 양국에서 대일 항쟁의 시발’이라 했고 박대통령의 건의로 시 진평 주석은 하얼빈 전투 현장에 기념관을 건립했다. 안 의사 유훈을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
진용옥 경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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