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시론] 교통안전 교육이 만드는 ‘안전 경로의존성’

현재 표준으로 자리 잡은 영문자판은 1873년 개발된 쿼티배열이다. 자판기 왼쪽 상단에 나란히 위치된 알파벳 QWERTY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하지만, 쿼티자판이 가장 빠른 타이핑체계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1936년 워싱턴 대학의 드보락(A. Dvorak) 교수는 많이 사용하는 모음과 자음을 중앙에 배열해 타이핑 속도를 개선했다. 드보락자판의 효율성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해군의 연구에서도 증명됐다. 하지만 사용자들은 쿼티배열을 고수했다. 새로운 자판을 익히는데 필요한 학습비용 때문이다. 드보락배열은 사라져갔고, 쿼티는 현재까지도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한번 형성된 기술이 관성과 교체비용으로 인해 고착되어 있는 상태를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이라고 한다. 닻을 내린 곳에 배가 머물 듯 친숙한 기억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기존 선택을 반복하는 것이다.

경로가 설정된 후 이를 바꾸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많은 비용이 수반된다. 운전 중 DMB 시청이나 휴대전화 사용은 법령으로 금지하고 있다. 또한, 매년 많은 예산과 인력을 투입해 캠페인이나 홍보, 그리고 단속 등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도로 위에서 어렵지 않게 목격된다.

이처럼 성숙하지 못한 교통문화로 인해 지난 2013년 21만 건이 넘는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이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무려 24조444억원에 이른다. GDP의 1.7%, 국가 총예산의 10.2%에 이르는 규모다.

따라서 애초부터 교통안전을 습관화해 안전에 집중된 경로의존성을 만들어야 한다. 어릴 때부터 교통안전 교육을 통한 안전의식을 확립한다면 인적요인에 의한 사고는 물론, 시설 투자와 제재·단속에 투입되는 사회적 비용도 함께 감소시킬 수 있다.

선진국은 이미 초등학교부터 교통안전 교육을 의무화하고 있다. 일본과 독일은 학교, 가정, 관계기관 등의 광범위한 협력을 통해 이론부터 체험까지 종합적인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한자능력처럼 교통안전 교육을 인증제나 등급제로 시행하기도 한다. 프랑스는 초등학교를 입학하기 위해서 인증서를 제출한다.

선진국의 이러한 교통안전 교육은 기본수칙을 지키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도로에 정착되게 만들고 있다.

우리나라도 법령을 통해 교통안전 교육을 실시하고는 있다. 하지만, 연간 최소 10시간만 충족하면 돼 형식적인 교육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또한, 교육 프로그램의 다양성 결여로 심화학습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범국민적 지원을 바탕으로 보다 적극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교육 효과를 높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실제 도로환경을 반영한 체험 교육의 확대를 통해 직접 위험상황을 느끼고 대처방법을 고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나이별로 인지적 성숙도나 습득능력이 다른 만큼 연령에 맞춘 단계적 교육 프로그램의 개발과 전문 강사의 확충도 동반되어야 한다.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교통안전 교육을 통해 우리 사회가 안전의 경로에 정착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오영태 교통안전공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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