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논단] 묘제 단상

단풍철은 이미 지났고 스키시즌도 아닌데 밤늦도록 길이 막혔다. 묘제(墓祭)에 참가하려는 귀향 행렬 때문이었다. 시제(時祭) 또는 시사(時祀)라고도 하는 묘제는 우리 고유의 추수감사 의식이다. 추수를 다 마친, 한해 중 가장 절기가 좋은 음력 10월에 올려 진다.

나도 동생네 가족들과 함께 묘제 귀향길에 동참했다. 평소보다 3시간이나 더 걸려 밤늦게 도착하니 고향 집에는 제사음식을 만드는 냄새가 가득하다.

묘제 음식은 조상님들 산소 숫자만큼 준비해야 하니 여간한 일이 아니다. 올해도 이 많은 음식준비가 팔순의 어머니와 집안 숙모님들에게 맡겨졌다. 도시에 나가서 사는 며느리들은 저마다 바쁘고 서투르다는 이유에서다.

이튿날 아침 준비한 음식들을 싣고 산으로 향했다. 초겨울이지만 산감나무 잎사귀들은 여전히 붉고 까치밥도 더러 보인다. 유건(儒巾)과 흰색 도포를 갖춰 입은 어르신들부터 신세대들까지 50여 명의 제관들이 모였다.

산신제를 올리고 입향조(入鄕祖) 산소 앞에 모두 엎드렸다. 고향 마을에 맨 먼저 터를 잡은 14대 조모님의 산소이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치면 420여 년 전의 일이다.

임진왜란 때 쯤이나 될까. 그 할머니는 어린 아들 둘을 데리고 바다 건너 장기반도에서 배를 타고 고향 마을로 들어왔다고 한다. 여자의 몸으로 거대 씨족마을을 일궈냈으니 여장부라 할만하다.

묘제는 첫 술잔을 올린 뒤 축문을 읽는다. ‘유 세차(維 歲次)’로 시작해서 ‘상향(尙饗)’으로 끝나는 그것이다. 먼저 ‘갑오년 시월 며칠 몇 대 손(孫) 아무개가 감히 아룁니다’고 한 뒤 산소의 선조님을 불러낸다. ‘시절은 흘러 벌써 서리와 이슬이 내렸습니다.

우러러 묘소를 둘러보고 매만지니 선조님을 사모하는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삼가 여기 맑은 술과 정성들인 음식을 올립니다. 공경하는 마음으로 올해 차례를 올리오니 흠향하소서’라는 내용이다. 맨 처음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가히 명문이다.

이 골짝 저 골짝을 누비며 산소 10여 기를 돌고나면 늦가을의 해가 얼마 남지 않는다. 이제 조상들께 올린 술을 나눠 마시며 문회(門會, 문중회의)를 할 차례다.

한지(韓紙)로 묶어져 내려오는 문회 문서의 첫 장에는 소화 9년(1934년)의 묘제가 기록돼 있다. 문서 정리를 마치고 의제 토의에 들어갔다. 올해의 의제는 더 이상 음식준비를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들에게 맡길 수 없다는 것이다. 어느 동생이 “누구네 집안처럼 우리도 이참에 그만두자”고 주장했다. 묘제 폐지론이다. 10촌 동생은 “추석을 앞두고 단체벌초할 때 술과 음식을 올리자”고 했다.

벌초 대체론이다. 칠순을 바라보는 6촌 형님이 목소리를 높였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식의 결사 유지론이다. 그러면서 “내년 묘제 음식은 내가 맡겠다”며 솔선수범을 보인다. 폐지론과 벌초 대체론을 내놓았던 동생들이 황급히 꼬리를 내렸다.

이로서 소한(小汗) 정씨 사문(私門)의 묘제는 1년 유예 판정을 받았다. 과연 내년에는 어떤 결말이 나올른지.

정기환 前 중앙일보 경인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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