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개헌은 경제를 삼키는 블랙홀”이라며 논의 자체를 봉쇄하고 있다. 개헌론을 꺼내들었던 집권여당 대표가 청와대의 시퍼런 서슬에 놀라 하루만에 “죄송하다”며 꼬리를 내렸다. 이런 뒷맛이 씁쓸한 촌극 자체가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 극복을 위해 개헌이 필요하다는 방증이라는 비판마저 나오고 있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묵묵부답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내년 예산안 시정연설 직후 국회 지도부와의 회담에서 야당이 개헌론의 필요성을 제기했지만 애써 모르쇠로 일관했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미국에 비해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 말 그대로 ‘대권(大權)을 행사하는 무소불위의 제왕’이다.
미국은 입법권을 의회가 독점하지만, 우리는 아직까지 대부분의 중요 법안을 정부가 제출한다.
조약체결권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은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지닌 조약 체결 협상의 대상, 시기, 내용, 범위 등을 구체적으로 명기하여 정부에 한시적으로 수권한다. 하지만 우리는 정부가 모든 것을 ‘맘대로 협상’하고 국회는 오직 찬반 투표의 권리만 행사할 뿐이다.
나라살림에 가장 중요한 예산편성권도 미국은 의회가 전적으로 행사한다. 반면 우리는 정부가 완전히 독자적으로 예산을 편성하여 국회에 10월 2일까지 제출하면 국회는 12월 2일까지 심의확정권만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
추석 연휴, 국정감사 등을 고려하면 실질적인 예산 심사에 주어지는 시간이 기껏해야 2, 3주에 불과하기 때문에 예산심사가 졸속에 그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의회의 견제를 받지 않는 막강한 인사권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은 상원의 인준을 얻어야 하는 직위가 1,200여개가 넘지만 우리는 실질적으로 국회가 의결권을 행사하는 청문회 대상 공직이 30여 개에 불과하다.
무소불위의 제왕적 대통령제는 대립과 투쟁이라는 극단적인 정치문화를 키웠다. 대통령을 당선시키기만 하면 모든 전리품을 독차지하는 승자독식의 문화는 대화와 타협의 공간을 없애 버렸다.
87년 헌법체제는 성년이 된 대학생이 아직도 중학생 교복을 입고 있는 꼴이다. 분권형 권력구조로의 개편이 시급하다.
백년대계인 교육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리지 않도록 학제 개편, 공교육투자 확대 등을 다룰 가칭 ‘범국민미래교육위원회’에 관한 내용이 담겨야 한다. 지방자치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불필요하게 세분화되고 과도하게 중첩된 행정구역 개편에 관한 헌법적 근거도 마련해야 한다.
개헌 논의는 여권의 강력한 차기 주자가 가시화되는 순간에 동력을 상실한다. 이번 정기국회가 끝나고 내년까지가 현실적으로 적기라고 생각한다.
권력구조 개편 등에 관한 합의를 이뤄낸 다음, 2016년 총선에 국민투표를 함께 실시한다면 정치적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총선을 정책선거로 치룰 수 있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지난 대선 때 “집권후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되는 개헌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지금이 개헌의 골든타임이다. 개헌을 통해 차기 권력 질서에 관하여 여야가 큰 방향의 공감과 합의를 이룬다면, 대화와 타협의 분위기가 조성됨으로써 대통령이 걱정하는 경제회복의 걸림돌 역할을 해왔던 정치가 오히려 경제회복을 촉진하는 기제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김진표 前 민주당 원내대표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