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디지털 유목과 J턴 귀향

산업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우리들 대부분은 고향을 떠났다. 이 시절 유행했던 가요 중에 하나가 앵두나무 우물가의 동네처녀다. 끝 대목에 ‘이쁜이도 금순이도 단봇짐을 쌓다네!’ 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 시절 금순이는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간 산업전사들을 대표한다.

그녀들은 댕기 머리를 잘라 가발을 만들어 수출에 보탬을 주었고. 저녁 늦게까지 재봉틀을 돌리면서 돈을 모았다. 동생의 학비며 부모님 약값도 부쳤다. 보내준 향토 장학금으로 공부를 하던 동생은 민주화에 눈을 뜨고 독재와 싸웠다.

그런 와중에 일단의 기술관료(테크노 크라트)들이 등장해 근대화는 늦었지만 정보화에는 앞서 갈수 있다고 외쳤다. 각고의 노력 끝에 정보화는 성공했고 이를 토대로 민주화는 비로소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흔히 민주화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는 보쉐비키나 불란서 혁명과 같은 서양에서 진행된 민주화 이야기이지 우리와는 일정한 거리를 둔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고귀한 피가 흘렀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 보다는 정보화를 먹고 자랐다는 편이 보다 더 공평한 평가일 것이다.

이란의 호메이니는 탄압을 피해 프랑스에 망명해 있었지만 팔래비의 녹색 혁명 덕택으로 보급된 전화와 제록스 복사기를 이용하여 국내추종자들에게 혁명 전파에 성공했다.

이렇게 성립된 원리주의 국가를 제록스 공화정(제록시크래시)이라 부른다 한국의 정보화는 민주화를 이룩한 토대기반 (인프라)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환란이 닥치면서 재개발이다, 부동산이다, 워크 아웃이다, 하면서 직장을 잃고 비 정규직으로 내몰리면서 서울은 더 이상 삶의 터전이 아니었다. 생거 서울 이거 경기 현상이 일어났다.

2000년을 고비로 디지털 유목민들은 낙향의 대오를 형성하면서 서울에 살던(生居) 주민들이 경기도로 이거(移去)하기 시작했다. 서울은 1992년 1천93만5천230명에서 정점을 찍고 나서 경기도는 2013년에 1천224만5천960명으로 서울보다 210만2천796명 많다. 처음으로 200만명의 격차가 생겼으며 2003년 말 1천20만6천851명으로 1천만명을 처음 돌파한지 10년만의 일이다.

이동 양상이 진행되면서 J 턴 귀향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이것이 새로운 고향으로 정착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왜냐면 슬기(스마트)폰을 휴대한 디지털 유목민은 여전히 서울로 유목을 떠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디지털 유목민이 원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중간에서 유목과 정착의 어정쩡한 생활을 영위하기에. U턴보다 J턴 귀향이 현실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지사는 토박이 경기도민으로 원주민에 속한다. 서울에 삶의 근거지가 있는 200만의 디지털 유목민을 경기에 터 잡도록 유도하는 도정이 필요하다. 듣기로는 빅파이니, 굿모닝 버스니 따복 마을이니 하는 단어들은 이제 점점 희미해져 간다. 디지털 유목민들을 J턴 고향으로 정착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진용옥 경희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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