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이르러 강력한 정부가 출현하면서 자립마을 형성에 동기를 부여하고 국가재원이 투입되는 등 자립 의지가 살아났지만 80년대 이후에는 개발 독선의 경향을 띠면서 관변화로 흘러가고 주민들은 또다시 수동적자세로 되돌아갔다.
이 시기에 시민사회는 민주화 운동에 골몰한 나머지 마을 공동체 운동에는 여력이 없었으나 90년대 이후 마을가꾸기와 공동체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하지만 시민사회의 독선적 발상은 마을 주민들과 유리되고 보조금에 의존하면서 생계형 종속화로 굴러갔다. 21세기 들면서 정보화시대가 열렸으나 자생적 마을 운동에는 여전히 침체했다. 시대 정신의 결핍과 환경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주민들의 필요성을 외면했기 때문이었다.
본시 우리나라는 개천 환단조선시대부터 홍익인간에 기반을 둔 우리 공동체 의식이 사회적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삼국시대에는 그 범위가 넓어지고 부족 단위의 제천 행사를 통하여 두레 공동체 의식으로 확대 발전하여 나갔다. 조선 시대에는 향약을 기반으로 향촌 사회의 자치 규약과 공동체 조직으로 구체화 됐으며 서원과 함께 향촌 사회의 발전에 기여했다.
향약의 주된 덕목은 ‘좋은 일은 서로 권장한다(德業相勸-덕업상권), 잘못은 서로 고쳐준다(過失相規-과실상규), 사람을 사귈 때는 서로 예의를 지킨다(禮俗相交-예속상교),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돕는다(患難相恤-환난상휼)’ 등이었으며 마을운동이 협동이나 품앗이 수준에서 자치 질서와 윤리 도덕의 확립으로 확대돼 나갔다.
일종의 결사(結社)와 계(契)조직의 근간이 됐으며 지역 주민들로부터도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민주화, 정보화 시대를 거치면서 이와 같은 공동체 의식은 와해의 위기에 내 몰리게 되었다. 그 이유는 과실상규 보다는 타도해야만 고쳐진다는 독선적 아집과 환난상휼보다는 일지매식 나눔 의식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마을 운동에 새로운 기운이 태동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수원 화서동 ‘꽃뫼 버들 마을’ 아파트에서는 입주민끼리 꽃을 심고 아이를 돌보는 자발적 공동체 어울림 방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개발 시대와 민주화 열풍으로 그 동안 잊고 지냈던 가족 공동체와 두레 품앗이의 공동체를 자생적 아줌마들이 주동하는 마을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자발적 자생적 운동에 따복운동이란 명칭을 붙인 것은 남경필 경기지사다. 따복마을을 통해 소득 증대나 분쟁 해소와 같은 기본적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려 함일 것이다. 경기도의 따복마을 운동은 향약의 기본정신을 되살려 앞에서 전개했던 다른 마을운동에서 나타난 실패를 극복해야 한다. 제 3의 마을 운동으로 주목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용옥 경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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