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논단] 서세동점(西勢東占)과 인천 아시안게임

2007년 4월, 쿠웨이트에서 제17회 아시안게임의 개최지로 인천이 선정되자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당시 인천은 송도 개발 열기로 한창 주가가 오르던 시절이었다. 말끝마다 ‘국제도시’, ‘동북아 허브 도시’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녔다.

그러나 한켠에서는 회의론도 없지 않았다. 서울, 부산에서도 이미 개최했던 대회를 뭘 굳이 끌어오나, 겉치레 행사에 돈만 쏟아 붓는 거 아니냐 등이었다.

이에 대해 인천 시정부와 유치위원회 측은 ‘아시아 시대’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을 치를 때 쯤이면 명실상부한 ‘아시아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세계 속 아시아의 위상이 지금(2007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별 주목을 받지 못하는 아시안게임도 그때 가면 올림픽에 버금가는 국제 스포츠 잔치가 될 것이다‘ 등의 논리였다.

과연 아시아는 많이 달라졌다. 아시아가 구미 열강들의 식민지배를 벗어난 지 70년이 채 지나지 않았다. 이제는 국제사회 전반에서 아시아 파워가 기세를 높이고 있다. 인천아시안게임을 목전에 두고 잠시 과거 아시아가 겪은 질곡의 시대를 상기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1521년 3월 마젤란이 필리핀의 사마르 섬에 상륙했다. 인류 사상 처음으로 지구를 일주하는 항해였다. 그러나 그는 원주민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는다.

이후 그의 조국 스페인은 수차례에 걸쳐 원정대를 필리핀으로 보낸다. 1571년 마침내 이 섬나라를 정복했다. 당시 스페인 국왕이던 펠리페2세의 이름을 따 필리핀으로 명명한다.

서세동점(西勢東占)-. 15세기에 시작된 대항해 시대와 지리상의 발견이 초래한 거대한 파도였다.

아시아는 속수무책이었다. 아시아라는 이름도 고대 그리스인들이 그들 나라의 동쪽에 있는 나라들을 가리키던 말이다.

포르투갈, 네델란드, 프랑스, 영국 등 저마다 동인도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유럽인들에게 동인도는 아시아를 의미했다.

필리핀에 이어 아시아 각지로 서구인들의 배가 들이닥쳤다. 인도와 인도네시아에는 이미 16세기에 영국과 네델란드가 들어왔다. 베트남은 프랑스 동인도회사에, 미얀마와 싱가포르 등은 영국에 접수됐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종이 호랑이로 확인되면서 중동아시아도 서구인들의 차지가 됐다.

서세동점의 거대한 파도는 마침내 동아시아로까지 밀려들었다. 아편전쟁(1840년)은 수천년을 이어 온 ‘아시아 시대’에 종언을 고했다. ‘서구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러일전쟁의 포문이 열린 1904년 2월 9일, 인천항의 모습은 그 시대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일본 해군이 바랴크 등 러시아 전함들에 선제 공격을 한 날이다. 당시 인천항에는 러시아 전함 외에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의 전함들이 검은 포신을 번뜩이며 닻을 내리고 있었다. 서구인들의 위세 앞에 아시아인들은 수세기 동안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다.

1951년 뉴델리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안게임은 질곡의 시대를 벗어난 아시아인들이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의식이었다. 수세기 동안 자기 결정권을 빼앗겼던 아시아인들이 ‘이제 우리도…’하는 자각이 아시안게임을 태동시켰다. 그러나 한국은 첫 아시안게임에는 참가할 수도 없었다. 일제 식민지배에서는 벗어났지만 한국전쟁이라는 시련이 다시 덮친 때문이었다.

이렇듯 사연이 적지않은 아시안게임이 인천에서 열리는 것은 의미롭다. 150여 년 전 서구 열강들의 전함들이 앞 다투어 몰려왔던 그 항구도시다.

이제는 세계인들이 아시아, 그 중에서도 한국을 크게 주목하는 시대가 됐다. 한류(韓流)는 문화와 경제를 넘어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인천아시안게임이 질곡의 시대를 거쳐 온 아시아인들에게 큰 위로와 새로운 꿈의 잔치가 되기를 기대한다.

정기환 前 중앙일보 경인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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