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슬픈 진도

실증적 연구와 관찰로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기준을 통렬히 비판하며 보여주었던 레비-스트로스. 그의 대표 저작물 가운데 하나인 ‘슬픈 열대’의 명명법을 따르자면 진도는 시방 ‘슬픈 진도’(엉뚱하지만)이다. 대한민국에서 지금 슬픈 곳이 진도뿐이랴만….

세월호 참사 때문에 진도사람들은 지금 대부분 공황에 빠져 있다. 300명이 넘는 목숨들을 품은 세월호가 가라앉은 조도면 일대의 주민들은 갯것 채취나 고기잡이를 비롯 어장 관리를 한 달 넘게 포기해야 했다.

진도 본토의 사람들 역시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의 뒤치다꺼리를 군말 없이 해야 했다. 혹시라도 유가족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 될까봐 큰 소리도 안 내고 웃지도 않아야 했다. 게다가 멀쩡히 살아 있다는 죄책감은 상당하다. 관광객의 발길이 끊어진 것 정도는 자식 잃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어서, 생업을 못해도 그러련 해야 한다.

내 고향 진도. 사람보다 개가 더 유명해 고향이 진도라고 하면 대부분 진돗개를 떠올리며 개의 안부를 묻는다. 근데 이젠 세월호를 떠올리고 세월호의 안부를 묻는다. 하지만 세월호에 대해 슬픈 소식 말곤 전할 게 없다.

진도는 이미 ‘진도아리랑’ 속에 ‘아리고 쓰린’ 마음을 담고 있는지 모른다. 진도아리랑의 후렴구를 보면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이라고 노래한다. 물론 이 후렴구를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순하게 발음하여 ‘스리 스리랑’으로 노래 하기도 하고, ‘서리 서리랑’으로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선 자꾸만 ‘아리고 쓰린’ 마음 때문에 그런 후렴구가 붙지 않았나싶다. 지나친 억측 내지는 견강부회인지 모르지만, 그럴 거라고 강변해본다. 세월호와 함께 바다 속에 가라앉은 목숨들을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필자는 사반세기 전, 고향 진도의 사람과 풍물을 그린 연작시 ‘진도아리랑’을 썼다. 그때 쓴 어떤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영민이는 끝내/돌아오지 못하고/영민이 떠나던 포구에/씻김굿 한바탕/대끝만 흔들거렸다.’ 이제 세월호 청춘들을 위해 씻김굿을 해야 하는가? 남은 이들에게 할 일이 씻김굿밖에 없는가?

익히 알려진 대로 진도엔 씻김굿이 성하다. 사방이 바다라서 배 타고 나갔다가 목숨을 잃은 이들이 많기도 했고, 고려말 이후 왜구들이 늘 출몰하여 주민들의 목숨을 많이 해쳤다. 그때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씻김굿을 해서 제 명에 못 죽은 이들의 영혼을 달래주는 의식을 치렀을 거라고 추측한다.

사실, 명을 다 채우고 죽었다 해도 슬프지 않은 죽음은 없다. 씻김굿이 처음엔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영혼을 달래느라 시작되었겠지만 차츰 죽은 사람이면 누구든 모두를 ‘씻겨주는’ 상례 내지 제례 의식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래서 오래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물론 몇 해 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도 씻김굿을 했다. 근데 그 씻김굿 가운데 바다에 빠져 죽은 이의 영혼을 달랠 땐 특히 넋건지기굿을 한다.

넋건지기굿…. 할머니 생전에 바다에서 살아오지 못한 마을 사람을 위해 바닷가에서 이 굿을 할 때 대나무를 잡은 할머니한테 바다에서 죽은 마을 사람의 영혼이 실려 할머니가 며칠 동안 꼼짝 못하고 앓은 적이 있었다. 설마 바다에서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을 것을 예감하고 진도에서 씻김굿이 성하진 않았을 것이지만 세월호가 진도 바다에서 침몰한 게 예사롭지 않은 것 같아 자꾸만 몸이 떨린다.

진짜 씻김굿은 죽은이의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 땅이 진정 극락이 되도록 살아있는 이들을 잘 위무하는 것일 터이다. 그런데 씻김굿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안 당했으면 좋겠다.

박상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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