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지게 물광을 내야겠다는 욕심에 한방향으로 손을 돌렸지만…
왜냐하면 사무실로부터 수십컬레의 신발을 가져와 닦은 뒤, 다시 그 자리의 주인을 찾아줘야 하기 때문이다.
수 많은 신발 중에 같거나 비슷한 신발이 있기도 해 처음 구두닦이에 도전한 기자는 도대체 누구의 신발인 지 헷갈릴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 하루 기자의 구두닦이 멘토가 된 구두닦이 점방의 김모 사장님은 수십켤레의 구두를 마치 기계와 같이 구별해가며 손쉽게 구두의 주인을 찾았다.
노하우를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반복된 업무를 하면서 신발의 주인을 기억한다는 것.
비슷하거나 같은 신발은 헷갈리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우선 신발 사이즈로 구별할 것, 두번째로는 신발마다 사람이 어떻게 걷는지의 특성이 있어 신발 뒤축의 바깥쪽이 많이 닳거나 안쪽이 닳거나 하는 특성으로 구별한다고 한다.
구두를 닦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을 ‘구두닦이’라 한다. 유년시절 구두닦이를 했었다는 이야기는 성공한 유명인사의 인터뷰에서 최근까지도 종종 접할 수 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해 남양역과 용산역 일대에서 구두닦이를 했었다는 위철환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구두닦이를 하며 중·고등 검정고시를 합격하고 사법시험까지 합격한 판사 출신 변호사, 성공한 사업가 등의 이야기다.
또한 구두닦이로 살면서 힘겹게 번 돈을 차곡차곡 모아 불우한 이웃을 도와달라고 수억원을 쾌척했다는 미담도 종종 흘러 나온다.
물론 대다수 구두닦이의 이야기는 아니다.
구두닦이라는 직업은 성공한 사람의 스토리텔링에서 힘겨웠던 삶을 겪었던 과정을 상징한다는 측면에서 볼때도 그리 내세울만한 직업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하루 종일 다른 사람의 구두를 닦고 수선하는 구두닦이를 체험하면서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는 불변의 진리를 온몸으로 체감했고, 적어도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면 보람된 직업임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24일 오전 8시20분 수원시 송죽동의 한 버스정류장 인근에 있는 구두방에 도착하며 구두닦이로의 하루는 시작됐다.
도착하자마자, 구두방 김 사장과 함께 짜여진 스케줄에 따라 움직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아직은 낯설기만 하다. 이렇게 운반해 온 6켤레의 구두를 닦기 위해 구두방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
구두의 광을 내기 위해서는 몇단계를 거친다.
첫 단계는 구두약을 묻힌 뒤 솔로 신발의 먼지를 털어내는 일. 이를 마친 뒤 본격적인 광내기 작업에 돌입했다.
구두를 닦기 위한 천을 가운데 세손가락에 씌우고, 엄지와 검지 손가락 사이에 나머지 천을 똘똘 말아 고정시키는 작업이 우선이었다.
그러나 처음인지라 천을 고정시키는 일은 사전 작업임에도 10여분 동안 씨름해야만 했다.
어렵사리 고정시킨 천에 물을 묻혔다. 물광을 내기 위해서다. 구두닦는데는 물광과 불광이 있다.
빠른 작업이 가능한 불광은 작업상 숙련도가 따르고, 물광은 여러번 닦아야 해 조금 더 정성이 필요한 차이가 있다.
물을 묻히고 구두약을 바른 뒤 우선적으로 광을 내기 위한 초광작업에 들어갔다.
6켤레의 신발을 닦는 동안 천을 가는 것은 기본이었다. 처음보다는 제법 익숙해졌다.
곧이어 마지막 작업인 막광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당연히 번쩍번쩍 광이 나야하는데, 영 미덥지 않다.
문득 1998년 여름, 28살의 나이에 늦깎이 이등병 생활을 시작했던 군대 생각이 났다. 군대에서 점호를 할 때 중요한 점검사항의 하나는 전투화 상태이다.
이를 위해 군대에서는 저녁식사 후 10분 남짓한 시간동안 전투화를 닦는다. 2년2개월동안 매일하는 일이었지만 당시에도 같은 부대의 중대원과 비교해 볼 때 전투화 닦는 솜씨가 낫다고 볼 수 없었다.
첫 휴가인 100일 휴가 때는 선임 병장이 공을 들여 닦아준 전투화를, 말년 휴가에는 광을 잘 내는 후임병이 닦아준 전투화를 신고 나갔던 기억이 난다.
내가 선임병이나 후임병의 휴가 때 전투화 광을 내줬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 이것도 소질이 있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나도 멋지게 광을 내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다시 김 사장으로부터 코치를 받으며 한방향으로 손을 돌리며 광내기 작업에 몰두했다.
그러나 냉정하게 평가할 때 역시 낙제점이다. 그렇게 절반의 성공밖에 거두지 못한 구두는 김 사장의 손길을 거쳤다.
구두 한쪽당 10~15초 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김사장의 손을 거친 구두는 번짝거렸다. 물광의 완성이었다.
잠시의 좌절을 뒤로한 채, 오전 9시께 또다시 인근 가스안전공사와 쌍용자동차가 있는 건물에 구두를 가지러 갔다. 이번에는 조금 더 많았다. 10여켤레의 구두를 받아 챙겼다.
구두방까지의 거리는 수백m에 불과하지만, 8켤레의 구두를 한 손에 드니 꽤나 무겁다. 팔을 바꿔가며 구두방에 도착한 뒤 두번째로 구두 닦는 일에 도전했다.
‘이번에는 기필코 물광의 완성을 보고 말리라’
첫번째보다는 조금 더 익숙해졌다. 중간에 “생각보다 잘하네요”라는 김 사장의 칭찬도 나를 으쓱하게 했다.
그러나 역시 만족할만큼의 물광내기에는 실패했고, 결국 김사장의 손을 잠시 거쳐야 했다.
이후 잠시 휴식시간이다. 특히 이날 오전의 찌뿌둥한 날씨로 인해 손님은 뜸하다.
비가 오거나 흐리면 자동차 세차를 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두를 닦는 손님도 날씨에 따라 민감하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기다리는 손님의 구두굽을 기자가 교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김 사장이 어떻게 작업을 하는 지 지켜 볼 따름이었다.
이윽고 40대 여성이 구두를 맡기고 갔다. 드디어 나설 시간이다.
수차례 펜치를 사용해 하이힐 끝에 붙은 굽을 조심스레 띄었다. 쉽지 않았지만 성공했다. 이윽고 김 사장이 건네 준 굽을 망치로 4차례 내려쳐 구두굽 갈기를 완성했다.
약간의 자신감이 생겼지만, 이후 구두굽을 교체하기 위해 구두를 맡긴 손님은 없어 내 차지는 없었다. 어느 덧 오후 3시. 가장 많은 고정 월정 고객이 있는 경기일보사로 향했다. 매일 보는 반가운 얼굴들이었지만, 오늘 기자는 구두닦이로의 방문이다.
10켤레를 넘는 구두를 수거한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모두 내가 아는 직장동료의 구두를 닦는 순간이다. 오전의 경험도 있고 해서, 조금은 더 잘 닦고 싶은 마음이다.
정성스레 순서에 따라 솔질을 하고 천을 고정시킨 뒤 초광 작업을 마치고 막광 작업에 돌입했다. 최소한 세켤레는 완성시켜야지라는 작은 목표와 함께.
오전보다는 확실히 업그레이드 됐다. 그러나 마지막 김 사장의 손길은 또다시 빌릴 수 밖에 없었다. 닦은 신발을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놔야했지만, 누구의 신발인 지는 여전히 헷갈렸다. 어렵사리 신발을 갖다놨지만 신문사로 복귀하는 몇몇 기자의 신발을 다시금 받아 또다시 닦고,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놨다.
오늘 하루 일과의 가장 큰 일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이후 오후 7시30분까지 구두방을 지키며 2차례 구두굽 갈기와 함께 일과는 끝이 났다.
하루를 꼬박 함께 보낸 김 사장의 수입은 결코 많지 않았다. 아니 작았다.
“여름에 장맛비가 올때는 하루를 공치고, 오늘 오전 같이 날이 찌뿌둥할 때도 손님이 많지 않다. 그러나 가을이 오면 손님이 더 많이 는다”며 내일은 더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김 사장의 모습에서 잔잔한 감동이 느껴졌다.
어떤 일이든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김 사장의 모습에 ‘직업엔 귀천이 없다’라는 말이 조용히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오늘 밤 퇴근 후엔 만삭의 몸으로 회사에 나가는 아내의 구두를 닦아줘야겠다. 내가 사랑하는 만큼 번쩍번쩍 광이 나도록….
이명관기자 mklee@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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