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표지를 스친 손가락으로 먼지가 묻어났다. 아마도 여러 해 꽂혀 있었던 듯싶다. 더들리 휴즈의 ‘한국 전쟁-마지막 겨울의 기록-’인데, 내가 산 기억은 없다. 무협지 냄새 풀풀 나는 이런 책에까지 돈을 쓸 만큼 독서광은 아니다. 그런데 얼핏 꺼내본 책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는다. 파란 눈의 병사가 60년 전 전장에서 쓴 일기가 풍기는 메케한 화약냄새 때문이다. 포탄이 스치면서 내는 소름 끼치는 금속성 굉음, 본토에 아내를 향한 지아비의 사랑, 전쟁에 쓰레기더미에 파묻혀 가는 참담한 한국인의 생활이 영상처럼 적혀 있다.
1953년 1월 24일
철원 부근 스퍼트힐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했다. 공군이 60톤이 넘는 폭탄과 14발의 네이팜탄을 언덕에 쏟아 부었다. 포병대대는 수천 발의 105밀리미터 포탄을 발사했다. 이어 F-84기가 언덕에 5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그러나 적군들은 피해를 입지 않고 개미 언덕의 불개미처럼 동굴과 참호에서 기어 나왔다. 65명의 중국군이 사망했고 77명의 유엔군이 사망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취임하던 이날의 우리 작전은 실패했다. 왜 독가스가 땅속에 있는 적군들을 살상하기 위해 사용되었는지 그 까닭이 명백해졌다.
1953년 2월 5일
갑자기 쉭- 쉭- 쉭- 하고 박격탄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길 위에 납작 엎드렸다. 포탄이 6미터 옆에 떨어졌는데 폭발하지는 않았다. 두 번의 포격이 더 있었다. 쉭 꽝, 쉭 꽝. 세 발 모두 불발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신이 도운 걸까 아니면 탄약이 잘못된 것일까. 포탄에 맞게 되면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던데 그것도 틀린 말 같다. 엎드리면서 돌덩어리에 턱이 부딪히는 바람에 입술이 찢어지고 아랫니가 덜렁거렸다. 상이훈장을 신청하라는 의무병에게 말했다. “이건 포탄에 맞은 게 아니란 말이야. 됐다.”
1953년 2월 6일
<편지> 내일 지프가 와서 소대가 있는 새로운 지역으로 날 데려다 줄 거야. 거기 도착하면 맨 먼저 샤워를 하고 깨끗한 옷을 입을 거야. 그리고 나서 밤에는 임무를 수행하려고 뛰쳐나오는 일 없이 침대에 누워 당신 꿈을 꾸며 푹 자고 싶어. 입술이 따갑고 아파. 당신과 함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거야. 지금은 상상도 하기 힘들 지경이지만 말이야.-나는 ‘전투 중 부상’이라는 소식은 숨겼다. 아내에겐 언제나 그랬다. 그래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는 심지어 보이스카우트 캠핑장과도 같은 즐거움을 줄 지경이다. 편지>
1953년 2월 28일
버드에게 말했다, “나는 곤잘레스가 군 법정에 서는 걸 원치 않는다. 당장 그 여자 아이를 밖으로 내 보내라고 말하게.”한국인 여자 아이는 그 후로 부대에서 보이지 않았다. 전쟁을 치르면서 한국 국민들은 침략자나 방어자만큼 고통을 겪었다. 군대가 한반도를 휘젓고 다니면서 집과 마을을 파괴했다. 많은 남편과 아버지, 형제들이 죽거나 입대했다. 가족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부대에 많은 심부름꾼 아이들은 가족에게 돈을 보내기 위해 와 있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몸을 파는 여자들도 많았다.
이건 칼럼이 아니다. 때론 어쭙잖은 주석이 본문의 생생함을 움츠러들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대로 옮겼다. 미국 포병 장교 휴즈가 181일간 목숨을 내걸고 적어 내려간 이 기록보다 전쟁의 아픔을 설명해낼 재주가 내겐 없다. 북이 휴전협정 파기를 선언해도 꿈쩍 않는 우리, 개성공단 입구를 막아버려도 꿈쩍 않는 우리, 미사일을 쏘아댄다해도 꿈쩍 않는 우리. 자신감에서 나온 당당함이라면 좋으련만 무감각에서 오는 방심이라면 큰일이다. 60년 전 전장속으로 한번쯤 들어가 볼 때다.
[이슈&토크 참여하기 = 冊 ‘한국전쟁 -마지막 겨울의 기록-’]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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