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현장체험]시각장애인활동보조인

산책하고 은행업무 보는데 꼬박 5시간 … 사회적 인식개선 아쉬워

“장애인활동보조인의 역할은 장애인에게 손ㆍ발이 되어 주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시각장애인 활동보조인 1일 체험에 나선 나에게 선배(?!) 활동보조인이 가장 먼저 당부한 말이다. 시각장애인들은 혼자서는 외출이나 외부활동 등에 상당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들은 학습 및 의식 수준이 높아 기회와 여건만 준다면 다양한 능력을 펼칠 수 있다. 활동보조인은 이러한 시각장애인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선배의 조언이었다.

시각장애인들의 가장 가까이에서 생활하고 있는 활동보조인의 일상으로 들어가 봤다.

대한안마사협회 경기지부와 장애인생활자립센터 등의 도움을 얻어 활동보조인 1일 체험에 나서면서 장애인분들을 만나뵙기 전 “호칭을 어떻게 불러야 하나, 혹시 그들이 싫어하는 말투와 질문이 있지는 않을까” 등 이런저런 걱정이 앞섰다.

생각해 보면 지금은 돌아가신 나의 삼촌 할아버지 역시 시각장애인이셨다. 아주 어렸을 때 뵈었던 삼촌 할아버지에 대해 나는, 항상 방안에서만 앉아계시며 앞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천원짜리와 만원짜리를 정확하게 구분해 용돈을 ‘많이’ 주시던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함께 밥을 먹거나 산책을 나섰던 기억은 없다. 할아버지와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았어도 되었을 텐데 라는 후회가 밀려왔다.

많은 고민을 머릿속에 담고 지난 28일 오전 10시30분께 안산시 월피동에 거주하고 있는 1급 시각장애인 김재홍씨(54) 집을 방문했다. 김씨의 집에는 기자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놀러 온 친구 김기홍씨(55ㆍ1급 시각장애인)가 함께 있었다.

우리나라는 시각장애인을 ‘장님’, ‘맹인’, ‘시각장애우’ 등 다양하게 부르고 있다. 어떻게 부르는 것이 시각장애인들이 듣기 좋은 표현인지 고민이 됐다. 그런 나의 고민을 김재홍씨가 단번에 해결해 주셨다. “그냥 편하게 불러요.”

시각장애인은 그냥 시각장애인으로 부르는 것이 가장 듣기도 편하다고 했다.

현재 대한안마사협회 경기도지부 복지분과 위원장을 역임하고 있는 김재홍씨는 김 위원장님으로, 친구 분인 김기홍씨는 김 사장님으로 부르기로 하고, 일과를 시작했다.

활동보조인은 출근하면 먼저 카드 리더기에 출근 체크를 해야 한다. 출퇴근 시간을 정확히 해 임금을 정산하려는 것인데, 김 위원장은 한 달에 96시간을 지원받는다.

규정대로 하면 활동보조인은 부부 장애인을 제외하고는 1인당 1명밖에 보조를 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은 특별히(?!) 김 사장까지 2명의 활동을 돕기로 하고 출근 체크 후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나의 미션은 ▲산책하기 ▲은행 업무보기 등이다.

한달에 96시간이면 하루 약 3시간 남짓이다. 활동보조인을 지원받을 수 있는 시간이 한정돼 있어 우리는 서둘러 산책을 나섰다. 오전 11시께 두 분은 내가 챙겨 드린 신발을 신고, 내 양쪽 팔을 한쪽씩 붙잡은 채 인근 공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분이 내 손을 잡는 순간 “아!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보폭은 어떻게 해야 하나” 등 많은 생각에 긴장됐다.

잔뜩 긴장한 것을 느꼈는지, 김 위원장은 “우리보다 반보 앞에서 그냥 편하게 걸으면 되요. 이 기자가 걷는 속도와 몸의 움직임으로 앞에 장애물이 있는지, 계단인지 평탄한 길인지 알 수 있어요”라며 오히려 나를 리드했다.

그렇게 공원을 향하던 우리는 8차선 도로 횡단보도에 섰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보행자신호가 들어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나는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거리기 시작했고, 바로 옆에 보행자신호 버튼을 누르라는 안내표지를 보게 됐다.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없었다면, 안내표지를 보지 못하는 이분들은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한 채 누군가 도와주기 전까지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겠구나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만약 안내표지가 아닌 음성으로 보행자신호 버튼을 누르라는 안내가 나왔으면 시각장애인들에게 조금 더 도움이 됐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원에 도착하기까지 15분가량의 동네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시각장애인들을 괴롭히는 장애물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곳곳에 설치된 볼라드(차량 진입방지용 말뚝)와 최근 성능이 좋아져 소리없이 다가오는 자동차들. 또 공원에는 큰 배수로가 있어 자칫 시각장애인들이 빠질 수 있는 위험도 있었다.

어렵사리 도착한 공원에서 잘 포장된 산책로를 따라 한 시간가량 걷기 운동을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두분이 시력을 잃게 된 이야기, 김 위원장님의 아내가 4개월 전 지병으로 돌아가신 이야기, 자녀와 떨어져 살게 된 이야기 등을 함께 나누면서 조금이나마 시각장애인들의 삶을 느낄 수 있었다.

김 위원장은 “현 정부는 손자를 돌보는 노인들에게는 보육수당을 준다고 하면서 장애인의 직계가족들이 직접 활동보조인으로 돌보는 것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며 “도우미 지원 시간 역시 1급 시각장애인은 3급 지체장애인 수준밖에 지원받지 못한다. 또 돈을 주는 주체가 장애인이 아닌 복지관이다 보니 일부 도우미들은 복지관 눈치만 보고 장애인을 위하지 않는다. 돈을 지급하는 주체를 복지관에서 장애인으로 바꿔야 한다”며 활동보조인 제도의 문제점에 대해 말했다.

김 사장도 다양한 이야기를 꺼냈는데 “최근 몇 년 사이 불법 마사지 업체가 너무 많이 생겨 안마를 통해 먹고사는 시각장애인들이 일터를 모두 빼앗겼다”며 “돈을 주는 지원보다는 장애인들이 직접 일을 해 돈을 벌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토로했다.

산책을 모두 마치고 나니 오후 1시가 됐다. 우리는 시내 은행으로 이동하고자 장애인 콜택시를 부르려 했지만, 장애인 콜택시는 최소 하루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고 한다.

결국 우리는 일반 택시를 타고 시내로 이동했다. 택시에서 내리자 길 건너편에 은행이 보였다. 시내는 정말이지 시각장애인들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길 곳곳에 볼라드가 설치돼 있을 뿐만 아니라 불법 주차된 차량,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오토바이 등으로 정말 위험천만했다. 기자는 긴장감과 걱정 속에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어렵사리 은행에 도착한 일행은 김 위원장의 새 통장을 만들기 위해 번호표를 뽑고 차례를 기다렸다. 통장을 만들기 위한 신청서 작성을 도왔다. 본인 이름과 서명은 직접 작성을 해야 한다고 해 김 위원장이 내 손을 잡고 서류를 함께 작성했다.

시각장애인이 은행 계좌를 만들 때는 별도의 규정이 있어 통장을 발급받기 조금 까다로웠다. 아마도 시각장애인들을 속이려는 사람들이 많아 이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였을 것이다. 김 위원장의 통장을 만들고, 김 사장님 통장 잔액을 확인하는데만 2시간가량이 소요됐다.

오랜 시간이 걸리고 까다로운 절차들이었음에도 불구, 너무나 감동적으로 끝까지 친절하게 업무를 도와준 SC제일은행 안산지점 김민화 대리와 이경이 팀장께 꼭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 드리고 싶다.

은행업무를 마친 뒤 시계를 보니 오후 3시였다. 인근 분식집을 찾아 김밥과 만두 등 비교적 먹기 편한 음식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난 후 김 위원장의 집에 도착하니 시계가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산책하고 은행 다녀오고 김밥을 먹는데 무려 5시간이 소요된 것이다.

활동보조인의 평균 근무시간이 3시간인 것을 생각하면 보조인 지원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카드 리더기에 퇴근을 체크하고 오늘 일과에 대해 기록지를 작성하면서 체험 일정을 마쳤다. 활동보조인의 시급은 8천850원이며 이중 2천여원은 자립센터 회비로 내고 6천500원이 남는다. 이 6천500원에서 또 4대 보험료를 내고 나면 5천원 가량이 남는다. 오늘 6시간을 일했으니 3만원 가량을 번 셈이다.

하루종일 긴장을 해서인지 몸은 천근만근인데 3만원을 벌었다고 생각하니 왠지 씁쓸했다. 김 위원장이 돌아서는 내게 마지막으로 건넨 말이 머릿속에 아직도 맴돈다.

“이 기자, 우리 시각장애인들이 편견의 바다를 건너는 것이 언제쯤 가능할까?”

이번 1일 체험를 마치면서 시각장애인들에 대한 사회적 제도와 인식이 개선되는 것은 물론 활동보조인에 대한 처우도 하루빨리 현실화되기를 바라본다.

이호준기자 hojun@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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