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현장 누비던 ‘바바리맨’ 경기도 문화 르네상스를 꿈꾸다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주로 여학교 앞에 자주 등장하며 바바리코트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바바리코트만 입고 등장하는 남자’.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 없는 부류다. 그런데 그 속이 궁금한 바바리맨이 나타났다. 매일 아침 7시 15분이면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부지런한 바바리맨이다.
특히 바바리코트에 양손을 찔러 넣고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그의 모습은 기존 바바리맨의 정의를 바꿔놓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다.
그의 정체는 바로 “영화 ‘형사 콜롬보’의 주인공이 바바리를 입고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에 빠져 바바리를 즐겨 입는다”는 엄기영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다.
1년여의 짧다면 짧은 시간, 쉴 틈 없이 바바리코트 자락을 휘날렸다
엄기영은 우리나라 패션계에 바바리코트를 유행시킨 주인공으로 꼽힐 정도의 유명인사다. 우리나라 대표 언론인으로 얼굴을 알렸다.
특히 그가 ‘바바리맨’으로 인식된 것은 MBC 프랑스 특파원으로 활동했던 1980년대다. 하지만 그의 바바리 사랑은 그 이전부터였다고.
“바바리맨에 그렇게 나쁜 의미가 있는지 전혀 모르다가 나중에 알았어요. 기자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형사 콜롬보가 바바리 코트를 입고 현장 수사를 벌이는 모습이 멋져서, 취재 현장의 수사관 같은 느낌으로 입기 시작했거든요. 여름에 입을 모시 바바리를 찾을 정도로 좋아하죠.(웃음)”
이 같은 바바리 사랑은 앵커에서 2010년 MBC 대표이사 사장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그리고 경기도 대표 문화기관인 경기문화재단 수장인 지금까지 이어졌다.
지난해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로 취임하면서 그는 매일 아침 7시 15분이면 그 멋들어진 바바리코트를 휘날리며 재단 건물로 들어선다. 언론사 사장직에서 문화기관 수장으로 근무하는 직장과 그 성격은 크게 바뀌었지만, 부지런한 아침형 바바리맨의 삶은 변함없다.
“아침에 일어나서 신문과 뉴스를 확인하는 것은 앵커 때와 똑같은데 관심이 문화 쪽으로 확 쏠리게 된 것이 가장 큰 변화죠. 예전에 정치, 외신, 사회 순으로 보도내용을 확인했다면 이제는 무엇보다 문화면부터 챙겨봐요.”
특종과 속보 경쟁 체제에 익숙했던 엄 대표에게 이뤄진 변화가 비단 이것뿐이겠는가. 취임 초 수십 년간 문화예술계와 다소 거리 있는 언론인으로서 살아왔던 만큼 그를 보는 곱지 않은 시선이 존재했다.
엄 대표는 이를 불식시키고 문화예술기관의 수장으로 거듭나고자 무던히도 문화예술계 현장을 누볐다. 1년여의 짧다면 짧은 시간, 쉴 틈 없이 바바리코트 자락을 휘날렸다. 그 결과 엄 대표는 명확하게 경기도 문화예술계의 특성과 가야 할 길을 선명하게 그린다.
“경기도 문화의 특장점은 ‘다양성’과 ‘역동성’이에요. 그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풍성한 자산을 갖고 있죠. 경기문화재단은 다양한데서 힘을 찾아 그것을 중심의 문화로 발현시키는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흔히 직원을 가장 피곤하게 만드는 직장 상사로 ‘부지런하고 똑똑한 사람’을 꼽는다. 그간 이른 아침 출근해 넓은 도내 현장 곳곳을 밟는 엄 대표를 상사로 둔 직원들의 고충(?)이 만만치 않을 듯하다. 그러나 기우다.
최근 재단 내부에서는 엄 대표 취임 후 조직이 유연해졌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심지어 ‘어리바리한 면도 있다’며 텔레비전 화면에서 익숙했던 딱딱한 모습에선 상상할 수 없었던 인간적이고 선한 심성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있다.
“실제로 제가 어리바리합니다.(웃음) 인간 누구나 다 결함이 있고 완벽할 수 없잖아요. 인류의 진보가 집단 지성의 의견을 듣고 발전한 것처럼, 저 스스로 겸손하게 한 사람 한 사람과 소통하면서 그들의 뜻을 모아야죠. 실제로 우리 재단 직원들 최곱니다.”
자신의 일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열정적으로 임하는 직원을 틀에 박힌 근무 환경에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지론이다. 더욱이 문화예술의 중심에 선 특수한 조직인만큼 직원 모두 스스로 ‘문화인’스러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쉼 없이 발품을 팔았다. 또 집단 지성(재단 직원)의 의견을 모으려고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한 방법으로 수원 광교산 직원 등반 대회 후 막걸리 회동을 열고, 팀마다 찾아가 술잔을 부딪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술은 소통을 위한 또 하나의 미디어인 것 같아요. 그렇다고 폭음은 안해요.(웃음) 터놓고 이야기하다 보면 우리 직원 한 분 한 분이 가진 재능에 놀라고, 그 자산을 귀하게 여겨 활용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다시 한 번 되새기죠.”
바바리맨, ‘MAGIC Q’ 마법을 부리다
이처럼 낮은 자리에서 끊임없이 소통을 시도했던 그가 유독 ‘불통’한 것이 있다. 언론인이었던 엄 대표는 정작 대표 취임 후 개별 인터뷰 한 번 응하지 않으며 꼭꼭 숨었다.
“수십 년간 기자와 앵커로 시청자를 만나다가, 대표가 되면서 익명 속에 자유를 누리자 싶었죠. 사실 무엇보다 조직, 대표로서의 역할과 책임, 경기도 문화예술계 특성과 현황 등을 파악하는 것이 시급했으니까요.”
인터뷰 한 번 하자는 기자의 제안에 “어이쿠, 어떻게 제가….”라며 사람 좋은 미소로 답했던 엄 대표의 속내이지 싶다. 누구나 알만한 언론계 한 후배의 애교 섞인 간청에도 정중하게 거절했다는 후문이 돌 정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가, 생뚱맞게 ‘마법을 부린다’며 전면에 나섰다.
엄 대표가 외는 마법 주문은 ‘MAGIC Q(매직 큐)’다.
Museum(박물관·미술관), Arts create(문예창작), Ggcf(경기문화재단), Identity(경기문화 정체성), Civic Culture(문화시민), C(Q)uration(큐레이션; 기획, 매개, 전달)의 영문 첫 글자를 딴 것이다. 엄 대표가 직접 아이디어를 낸 주문이다.
창립 16주년을 맞은 올해 제2의 도약을 준비하는 문화재단의 미션이자 비전으로 ‘문화예술이 도민의 행복한 삶을 이끄는 아름다운 마법’을 설정하고 대표 스스로 주문 외기에 나선 것이다.
“취임 후 줄곧 임직원과 머리를 맞대고 재도약을 위한 프레임 구상에 매진했고 이제 행동할 일만 남았어요. 2013년은 우리가 도민에게 진정으로 봉사하는 문화서비스 기관으로 거듭나는 때입니다.”
역점사업은 재단의 대표사업인 문화예술진흥사업을 안정적으로 독창적으로 운영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우후죽순 기초지자체 문화재단이 설립되고 ‘문화예술기관 시설 관리 공단’으로 전락이 우려되던 상황에서 ‘맏형’다운 결심이다.
재단은 또 남한산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과 중장기 보존 활용방안 수립, 경기도박물관·백남준아트센터·어린이박물관을 축으로 한 ‘뮤지엄 파크’ 조성과 체험 프로그램 마련, 재단 활동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문화전문 영상 애플리케이션 ‘MAGIC EYE(매직 아이)’ 운영 등을 추진할 계획이다.
그는 악화되는 재정난에 효율적 경영을 위한 마법도 부리기 시작했다. 취임 후 재단 내 전문인력으로 담당팀을 구성하고 추진 중인 ‘기부문화 확산’이 그 예다.
“우리나라 기부문화가 연말 불우이웃돕기나 자선냄비 모금 수준에 머물러 있는데, 문화 쪽으로 한 단계 올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단지 ‘기부하시오’가 아니라, 문화에 대한 투자와 기부의 가치를 알리는 인식 개선을 선행해야죠. 넓게는 문화 저변 확대까지 이루는 사업입니다.”
재단은 이미 지난해 기업과 개인 12곳으로부터 총 1억2천만원을 기부받았고, 기부자 대상 감사 행사를 벌였다. 그리고 올해 각계 오피니언 리더와 명사를 주축으로 한 후원회를 조직하고 대중 친화적인 모금 시스템을 구축할 방침이다. ‘문화라는 중요한 가치만큼은 지켜내자’는 소망에서 탄생한 사업이다.
이제 막 전면에 나선 엄 대표에게 떠나갈 때의 모습을 물었다. 한 때 발 담갔던 정계 복귀에 대한 의지를 묻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는 자신과 맞지 않는 옷’이라며, 그는 말했다.
“지금이 너무 좋아요. 할 일도 많고, 배울 분도 많고, 공유하고 협력해 만들어 갈 것도 많고…. 나중에 대표 자리에서 떠날 때, 재단 자산의 역량을 드높이려고 아우르고 포용했던 인자한 아버지로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훗날 그의 바람처럼 도내 문화예술계를 찾고, 보고, 다독이며, 격려했던 인자한 아버지로 기억되길 바란다. 하지만, 아직은 먼 이야기다. 그전에 엄 바바리맨의 마법이 통하길 응원해 본다. “엄기영, 매직 큐!”
글 _ 류설아 기자 rsa119@kyeonggi.com 사진 _ 김시범 기자 sbkim@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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