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인생시대] 이건영 화백

치열한 경영 일선 아듀~ 붓을 든 남자

인생의 절반을 전문 경영인으로 살아온 이건영(61) 회장은 ‘화백’이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자유롭게 삶을 영유하는 ‘화려한 백수’이자 그림 그리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화백(畫伯)’이라는 두 가지 뜻을 품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얼굴에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살아온 기업인의 거친 삶의 흔적 대신 하얀 캔버스 위 자유분방하고 열정적인 물감의 어울림이 배어 있다.

차가운 바람이 겨울을 실감케 하는 11월 13일 오전 이 회장의 자택(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경영인에서 화가로 변신한 그의 인생을 들여다봤다. 

이 회장의 ‘열정 결정체’ 가득…갤러리 같은 집안

인터뷰 일정을 조율하는 수화기 너머로 이 회장은 말했다. ‘일산의 지저분한 작업실 대신 비교적 깨끗한 집에서 손님을 맞고 싶다’고.

그렇게 방문한 그의 집은 단순히 깔끔한 가정집 수준이 아니었다. 집이 아닌 갤러리를 찾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밖이 훤히 보이는 넓은 유리창 너머로 가을빛 가득 머금은 나무와 하늘이 운치를 더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 자연이 품은 듯한 집 안 곳곳에 다채로운 소재와 주제, 표현 기법 등이 도드라지는 수준급의 미술작품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현관 오른쪽 벽에 작고 하얀 평면 위에 띄엄띄엄 검은 손 도장을 끊어질 듯 연이어 찍어놓은 소품부터 거실 벽면을 꽉 채운 회화작품, 작은 서재에 세워놓은 이젤 위 작업 중인 캔버스까지….

한 사람이 아닌, 수 명의 화가가 작업한 듯한 각양각색의 작품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유명한 작가들은 각각 자기 스타일이 있어서 작품만 봐도 누구 것이라고 쉽게 떠올릴 수 있죠. 하지만 저는 아직 아마추어여서인지 특정 주제나 사물 한 가지를 집요하게 그린다기보다 다양한 감정과 내면 그대로를 옮겨요. 그러다보니 여러 가지 표현 기법에 도전하고 그리고자 하는 대상도 다양한 것 같아요.”

집을 갤러리처럼 채운 모든 것이 그가 직접 그리고 표현한 작품이란다. 수 년 간 아마추어부터 전업 작가, 세계적 유명세를 자랑하는 국내외 미술가들의 작품을 본 기자가 보기에 꽤 수준급의 작품이어서 언뜻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해외 출장길 어김없이 갤러리 방문 “나는 준비된 화백”

도대체 그는 언제부터 화백을 꿈꾸고 준비한 것일까.

“기업을 경영할 때 정작 나라는 존재가 없었어요. 경쟁은 치열하고 책임은 따르고, 그러나 피할 수 없는 현실이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림은 ‘탈출구’였죠. 10년 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우선 자유롭게 나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미술을 시작했어요.”

30대부터 종합미디어 영상홍보물 제작 회사와 투자회사, 언론사 등을 꾸려왔던 전문 경영인이 50대 이후 붓을 들어 10여 년 만에 전문가 수준에 안착한 것이다. 경영인으로서의 추진력과 성실함, 특유의 감각을 짐작케 한다.

“회사 일로 해외 출장을 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그 지역의 미술관과 박물관, 갤러리를 방문하는 거였어요.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느낌이었거든요. 매번 화백으로서의 제 2인생을 다짐했죠. 뒤늦게 전업작가로 살면서 꽤 많은 수업료 냈어요.(웃음)”

그가 치른 가장 고가의 수업료는 ‘욕망 내려놓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치열한 경쟁을 뒤로 하고 진정한 자유를 얻고자 발을 디딘 제 2의 화가 인생. 하지만 역시 숨길 수 없는 욕망이 불거졌단다.

그는 쉽게 늘지 않는 미술 실력에 한숨을 내쉬고,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 비교하며 빨리 나아가고 싶은 욕심만 키우고, 내면과 일치하지 않는 작품에 분노하는 등 초심과 달리 욕망만이 앞서는 것을 느꼈다고 술회한다. 심지어 하얀 캔버스 앞에 앉으면 막막함에 새까만 화면만이 눈앞으로 밀려들어와 가슴 통증을 느낄 정도였다고.

“어느 날 그림을 그리려는데 가슴이 너무 아픈 거예요. 병원 진단 결과 예상치 못한 시간에 죽음까지 불러올 수 있는 협심증이었어요. 몇 개월간 유언장도 쓰고 차근차근 주변을 정리했어요. 그렇게 죽음에 초연해지는 순간, 비로소 욕망 전부를 내려놓는 가벼운 느낌이었어요.”

5년 여 전 벌어진 해프닝이다. 다행히 수 개 월 후, 그림 작업에 몰두하면서 나타난 단순 신경 증상으로 협심증은 오진인 것으로 재확인했다.

엉터리 진단에 성을 낼 수도 있으련만 이 회장은 당시 오진이 오히려 행운이었다며 미소 짓는다. 자신과 그 내면의 자유로움을 찾기 위한 그림 작업에 욕심이 사라지면서 젊고 건강한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란다.

이후 그는 홍콩, 싱가폴, 일본 등에서 잇달아 열린 ‘아시아 톱 갤러리 호텔 아트페어(AHAF)’에 작품을 출품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남이 인정하고 평가하는 것에서 자유로워지면서 날개를 단 것이다.

특히 그의 작업세계는 ‘30대 작가의 작품’이라는 관객평을 이끌 만큼 다채로운 표현 기법과 소재의 ‘작가적 도전정신’이 도드라진다.

다양한 기법 끊임없이 배우고 도전 ‘창작열은 청년’

1천111명의 웃는 얼굴 사진을 꼴라주한 후 그 위에 실크스크린으로 웃음인 지 절규인 지 알 수 없는 한 사람의 이미지를 부각시킨 <폭소> , 에어브러시와 붓으로 뽀뽀하려는 엄마와 냉담한 아들의 얼굴을 그려 이 시대의 가족 관계를 주목한 <사랑> , 세계적 사진작가 만레이의 대표작 ‘Noire et Blanche’에서 애교쟁이이면서도 때론 쌀쌀맞은 자신의 아내의 모습을 떠올려 섬세하게 회화로 옮긴 모사작, 슬픔과 기쁨이 극대화된 순간의 감정을 그린 <눈물> 시리즈 등이 그러하다.

“작품만 보면 굉장히 젊다고 그러는데 포토샵과 꼴라주, 판화기법 등 다양한 기법을 끊임없이 배우고 시도해서 그런 것 같아요. 화가가 되면서 거꾸로 청춘이 되는 셈이죠. 젊게 생각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발굴해야만 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 이보다 명약이 없어요.(웃음)”

정년이 없는 것을 화백의 장점으로 꼽는 그는 이제 평면 회화에서 나아가 음악과 영상, 조명 등이 어우러지는 미디어아트에 도전할 계획이란다. 낙엽 지는 풍경과 멈춰 있는 정물화 등을 그리며 시간에 빠져 외로움을 극대화하는 것보다, 역동적인 작업 활동으로 생동감 넘치는 제2의 인생을 꾸리겠다는 것이다.  

연신 꿈꾸는 미소를 머금고 자신의 작업계획을 설명하는 이 회장을 보니 ‘화백’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내리게 된다. ‘백세(百世)까지 활짝 핀 꽃(花)처럼 끊이 없이 자신의 새로운 재능을 일구는 이’가 그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10년 후, 그가 지금의 샘솟는 열정과 기발한 도전으로 한국의 ‘앤디 워홀’이나 ‘제프 쿤스’처럼 새로운 미술 세계를 여는 대표주자가 될 지. 100세에 인생을 돌이켜 볼 때 경영인이기보다 화백이 더 정확한 직함이 될 지 말이다.

글 _ 류설아 기자 rsa119@kyeonggi.com 사진 _ 전형민 기자 hmjeon@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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