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생활과 봉사활동을 동시에 '실버문화의 롤모델'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가정이나 사회 뒤켠에 물러나 있던 ‘노년’들이 젊은이 못지않은 왕성한 활동으로 ‘화려한 실버’를 보내고 있다.
조선시대 전국 제일의 남사당으로 이름을 떨쳤던 안성 남사당의 고장, 안성시에도 나이의 부담을 털고 반란을 꿈꾸는 이들이 있다. 바로 안성문화원(원장 양장평) 실버벽화예술단. 20여명의 어르신들로 구성된 실버벽화예술단은 주름진 손으로 안성시내 노후된 건물이나 공사장 차단벽 등의 공간에 벽화를 그리는 일을 하고 있다. 지난 10월 31일 오후 2시, 안성시 공도읍 문기초등학교에서 있었던 ‘2012년 실버벽화예술단’의 종강식 현장을 다녀왔다.
# 취미생활+봉사활동+친구사귀기 ‘1석3조’
문기초등학교 창고 담벼락에 60~70대 어르신들이 매미처럼 달라붙어 붓질이 한창이다. 바쁜 손놀림만큼이나 어르신들의 입도 바쁘다.
“아이고~ 허리야!”, “추운 날씨에 손가락이 얼어 붓질이 잘 안 되네.”, “강사님, 하트 모양은 좋은데 색깔이 너무 강해요. 색을 좀 죽여주세요.”, “어이~ 김씨, 사다리좀 잘 잡아줘.”
오늘은 ‘2012년 실버벽화예술단’의 마지막 수업이면서, 어르신들이 3개월 동안 배운 그림실력으로 합동작품을 마무리 짓는 아주 특별한 날이다. 매주 화요일과 수요일 주2회에 걸쳐 총 18회차 수업을 마친 20여명의 어르신들은 문기초등학교측의 벽화그리기를 부탁받았다. 지도강사 강종찬 작가와 어르신들은 초등학교 창고인만큼 고심 끝에 “그림에다 꿈과 희망, 행복을 그려넣자”고 마음을 모았다.
바탕색으로 칠하는 사전작업부터 도안 스케치, 페인트 조색, 리터칭 등의 작업까지 모두 어르신들이 직접 도맡아 진행했다. 꼬박 3일 동안 벽화를 완성했다. 어르신들은 각종 새와 나무, 어린이를 다양한 색감으로 표현해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는 재미있는 그림들로 창고 양쪽 벽면을 새롭게 변신시켰다.
바쁜 농번기라 종강식에는 어르신들이 다 참석하지 못했다. 강종찬 작가는 “벽화 그림 작업하시다 집에 깨 털러 가신 어르신도 있어요.(하하)”라고 귀뜸해줬다.
완성된 벽화를 본 초등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와 “와!멋있어요”를 연발했다.
하굣길에 만난 유정(9)·유소연(11) 자매도 “요 며칠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창고 주변을 왔다갔다 하셔서 청소부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멋진 그림을 그려주셨어요. 칙칙했던 창고에 예쁜 새들이 훨훨 날아다니니 할머니, 할아버지가 정말로 마술사가 같아요.”라며 한동안 벽화를 구경하느라 자리를 뜨지 못했다.
어르신들도 완성된 벽화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철부지 아이였다.
# 실버시대 老年의 유쾌한 반란
안성문화원에서 한자 공부를 하고 있는 김창호(67·석정동)씨는 실버벽화예술단 활동을 하면서 요즘 ‘제2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
김씨는 “좀 고상한 취미를 가져볼까 고민하던 중 실버벽화예술단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바로 접수했는데 학창시절, 미술시간 이후 그림을 처음 그려봤는데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작업을 하는 동안 아이들에게 멋진 벽화를 그려주고 싶다는 생각에 욕심이 났다”며 “소리치며 좋아하던 어린이들의 응원 덕분에 힘든 줄도 모르고 작업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들과 목재사업을 하는 이인숙(68·봉담동·여)씨도 “3개월 과정의 실버벽화예술단 활동이 인생의 새로운 재미를 선사했다”며 “환갑을 훌쩍 넘어 내 생애 첫번째 수채화를 그려봤고 이를 통해 벽화 그리기를 하면서 나 또한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게 됐다”고 종강 소감을 밝혔다.
집안일 하랴, 농사일 하랴, 소 키우랴 바쁜 여건 속에서도 실버벽화예술단 활동에만 매달리는 게 힘들었을 법도 하지만 어르신들은 “오히려 배운 게 많았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노년에 새로운 친구를 만날 수 있다는 장점도 강조했다.
허름한 시골 학교에 뉴욕 골목 못지 않은 거리 갤러리를 선물한 어르신들은 어느새 ‘실버 행복전도사’라는 훈장도 얻었다. 그러나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실버벽화예술단 활동을 통해 얻은 배움과 노하우를 안성 지역에 작은 도움을 주고 싶다는 것이 어르신들의 포부다.
이 같은 어르신들의 포부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안성문화원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안성문화원이 지난해 이어 2년째 역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실버벽화예술단은 한국문화원연합회가 실시한 ‘어르신 문화 프로그램개발’ 우수 프로그램으로 선정돼 보조금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
그림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는 어르신들을 위해 안성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업작가를 강사로 초빙해 환경미술에 대한 기초강의, 벽화디자인 강의 등 이론수업과 함께 야외 스케치 및 미술관 견학 등 현장수업을 곁들여 체계적인 교육이 진행했다.
그러나 1천만원의 예산으론 강사 인건비와 도구 및 재료비를 해결하는 것도 벅찬 것이 현실.
양장평 안성문화원장은 “은퇴 이후 안락한 삶을 위한 재테크를 뜻하는 ‘老테크’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노년의 삶을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재미있게 보낼 것인가의 문제인데 실버벽화예술단의 경우 취미생활과 봉사활동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실버문화의 롤모델이 되고 있다”며 “농촌 안성은 도시만큼 어르신들을 위한 다양한 문화 및 교양 프로그램이 다양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실버벽화예술단이 운영됨으로써 안성 지역에 새로운 실버문화를 만드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실버문화예술단 운영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담당했던 봉정우 사묵국장도 어르신들이 과거 직장생활에 쫓겨 손도 대지 못했던 취미생활과 봉사활동을 여유롭게 즐기는 모습을 보고 느끼는 바가 많았다고 했다.
봉정우 사무국장은 “농촌도시에서 실버벽화예술단이 지속사업으로 운영되기 위해선 지역주민들의 관심과 안정적인 예산 지원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3개월 동안 실버벽화예술단 어르신들을 지도한 강종찬 작가도 “어르신들께서 그림을 배우면서 삶의 활력을 찾고 즐거운 노년을 보낼 수 있는 이상적인 프로그램이 바로 실버벽화예술단”이라며 “단기교육과정을 이수한 어르신들이 이어 심화교육을 받고 지역에 재능기부를 할 수 있도록 사업이 지속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어르신들의 반란은 크지 않다. 단지 긴 세월을 밟고 선 자리에서 붓을 들고 안성을 예쁘게 그리고 싶을 뿐이다.
글_강현숙기자 mom1209@kyeonggi.com
사진_전형민 기자 hmjeon@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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