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노래 인생 2막이 활짝 열렸다
1977년 첫 방송 이후 매년 이슈를 몰고 다닌 대학가요제는 한국 가요계에서 신인 등용문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걸출한 가수들을 배출해냈다.
배철수, 임백천, 심수봉, 노사연, 유열, 신해철, 015B, 전람회(김동률), 김경호 등 한국 가요계를 뒤흔들었던 이들이 원조 오디션 프로그램인 대학가요제 출신들이다. 당시(1977∼82년) MBC 대학가요제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대단했다고 한다.
그 당시 인기 정도를 1979년 제3회 대학가요제 출신 포크가수 신영섭(55)씨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수준급의 기타 연주 실력과 함께 작사·작곡 능력까지 갖춘 실력파 뮤지션이지만 이름만 들어선 생소하다.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았을까? 지난 10월 4일 일산 호수공원에서 그의 인생과 음악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서울내기 다마내기’의 기타, 그리고 노래
가수치곤 평범해도 너~무 평범한 외모였다. 대기업 부장님 분위기가 물씬 나는 건 기자만의 느낌은 아니었다.
“평범하죠.(하하) 다들 기타 들고 무대에 오르기 전엔 몰라 봅니다. 가수라 해서 무조건 튀는 의상을 입거나 외모가 화려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편안함이 주는 매력이 분명이 있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음악도 바로 편안함과 일맥상통합니다.”
그의 노래 인생은 아주 평범하게, 그리고 우연찮게 시작됐다.
“아버지께서 중학교 입학선물로 기타를 선물해주셨어요. 기타 학원 딱 한 달 다니고 나서 사이먼 앤 가펑클 쓰리핑거 주법을 따라하곤 했죠. 초등학교 4학년 때, 부산으로 전학을 갔더니 친구들이 ‘서울내기 다마내기’라고 놀리더라구요. 낯선 부산생활에 적응하는데 있어 통기타가 친구가 되어 주었던 것 같아요.”
기자 아버지를 따라 김포에서 부산으로 이사를 간 그는 초·중·고등학교 시절을 평범한 모범생으로 지냈다. 부산대학교 섬유공학과에 입학하면서 인생의 반전이 시작됐다.
“아버님께선 무척이나 엄격하신 분이셨어요. 그래서 대학 가서 미팅도 처음해 봤고, 술, 담배도 처음 배우고 얼마나 재미나고 흥미로운 일이 많던지.(하하) 그 당시 부산대 출신 그룹사운드 ‘썰물’이 2회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차지하는 것을 보고 자극을 받았죠. 우리 세대들은 고등학교 시절 대학생 형·오빠·누나·언니들을 보면서 ‘언젠가 나도 대학가요제를 꼭 나가봐야지!’라는 생각 한번쯤 해보신 적 있을 겁니다. 그래서 한번 도전해 봤죠.”
교내 부산음악제와 박달음악제에 참가해 실력을 인정받은 신영섭은 대학 4학년 때 부산·경남권 예선에서 140팀을 물리치고 최종 본선 18팀에 합류했다. 본선 무대에서 본인이 작곡한 ‘젊음의 노래’를 들고 나가 당당하게 동상을 차지, 야구로 치면 10회 말 굿바이 만루홈런과 같은 성적을 거뒀다.
“저는 섬유학과였고, 생물학과 동기, 음악교육과 후배랑 같이 나갔는데 수상곡이 대중적인 곡은 아니었습니다. 빠른 발라드풍의 곡으로 승부수를 띄었죠. 가요제 수상 이후 서라벌레코드사에서 앨범을 내고 3개월 동안 짧게 방송활동을 했어요. 인기 좋았죠. 요즘 아이돌 인기 못지 않았습니다.(하하)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이렇듯 그의 인생 전반부는 순탄했다. 탄탄대로 일 것 같았던 가수 생활은 계속되지 못했다.
“ROTC 장교로 임관해 군복무를 마치고 83년도에 삼성전자에 입사했어요. 그때부턴 그야말로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살았죠.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바쁘게 살다보니 20여년을 음악과는 멀어져 있었습니다. 좋은 아빠, 좋은 남편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왜 태어났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더라구요.”
이 같은 그의 고민은 노래 ‘왜’에서도 묻어난다.
왜
작사·곡 신영섭
새장 속에 앉아 있는 저 새들은 정신없이 울어만 대고
앞마당에 목 줄 묶인 저 강아지는 나만 보면 꼬리를 흔드네
때가 되면 찾아왔던 저 철새는 때가 되면 되돌아 가고
봄이 되면 찾아왔던 저 꽃들도 때가 되면 사라져 가네
고민 끝에 그는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여태까지 남을 위해 살아왔으니 이제부턴 자신을 위해 살겠다는 것. 그리고선 대형사고(?)를 친다. 사표를 내던진 것. 두 번째 인생의 본격적인 서막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정작 내가 하고 싶은 노래를 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가족들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다니던 회사(스카이라이프)에 사표를 제출했던 거죠. 가수로서 대박을 터트리고 싶은 욕심은 없어요. 오랜 외도 끝에 나의 길을 찾았고 현재를 살아가는 과정이 곧 축복이라 생각하니 행복합니다.”
제2인생 개척 중…“내 음악적 나이는 여전히 20대”
그는 20여년의 공백기를 극복하고 노래로 새로운 제2인생을 개척 중이다. 정장 대신 청바지를 입고, 서류가방 대신 기타를 들고 집을 나선다. 1년 반 동안 매주 금요일 저녁 일산호수공원에 마련된 통기타음악회 무대에 서기도 했고 문화센터에서 주부들 대상으로 팝송 강의도 하고 있다. 또 중학교에서 학생들 대상으로 기타연주 수업을 하는 등 바쁜 일정을 소화해내고 있다.
“대학가요제 출신이지만 오랫동안 무대에 서지 않아 신인이나 마찬가집니다.
내 음악적 나이는 여전히 20대입니다. 세계적인 한류 열풍 속에 K-POP의 인기가 상상을 초월하지만 막상 중장년층은 소외되고 있는 상황이죠. 최근 세시봉 열풍이 불면서 중장년층 음악시장의 부활을 예고했지만 막상 중장년층이 들을 만한 음악은 굉장히 협소한 것이 사실입니다. 중장년층 또한 신나는 음악과 사람들의 환호성을 찾아 어디론가 모이고 싶어 하죠.”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그는 노래로 중년의 고된 삶의 무게를 풀어주고자 한다. 1집 ‘지금 이대로’는 사랑하지만 떠나야 하는 이들의 애절한 마음을 어쿠스틱 기타 반주로 노래했고 2집 ‘나에게로 다시’의 경우 인생의 덧없음을 알고 의연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3집 ‘왜’는 국악과 포크, 락이 합쳐진 곡으로 ‘로또 복권 발표나면 화장실 가서 지갑 속의 복권 꺼내네’ 등의 시니컬한 가사로 꾸준히 방송을 타고 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할 때는 어린 시절과 말년이며 가장 슬럼프에 빠질 때는 중년이라는 연구결과도 있더군요. 50대 때 불행을 느끼는 우울증이 가장 크다고 합니다. 선진 한국을 만드는데 고생한 중장년층을 위로할 수 있는 음악과 무대를 만들고자 합니다.”
신영섭은 아이돌이 대세를 이루는 가요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획일적인 일렉트로닉 계열 음악에 지친 대중의 귀가 일상의 감성을 전하는 그의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통기타 선율과 인생의 철학이 담긴 노랫말이 음악 팬들의 귀를 사로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의 음악을 듣고 중년들이 힘을 냈으면 해요. 성공도 중요하고, 사회적 책임도 중요하지만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저 또한 앞으로 계속 곡을 쓰면서 인생 2막의 희망을 노래할 생각입니다.”
그의 인생 2막은 이제부터다. 그는 강조한다. “내가 걸은 만큼 내 인생이고, 내가 노래한 만큼 내 인생이라고.”
신영섭은 오늘도 열심히 노래하며 ‘꽃중년’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글 _ 강현숙 기자 mom1209@kyeonggi.com 사진 _ 추상철 기자 scchoo@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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