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싸이가 빌보드 차트 2위에 올랐고 그의 노래 ‘강남 스타일’은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10월 들어 영화 ‘광해’가 1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올해 ‘도둑들’에 이어 두 번째 천만 관객 영화가 됐다. 김기덕의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를 포함, 올해 대중예술계에서 낭보가 이처럼 연이어 터지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닌가 싶다. 정권교체기에 정치권은 싱숭생숭하고 어지럽기만 하지만 한국인의 저력을 드러내는 즐거운 소식들에 그나마 국민들은 주름살을 펴면서 삶의 희망을 그려보기도 한다.
김기덕의 베니스 그랑프리를 통해 한국인이 울컥했던게 엊그제였는데 동시에 가수 싸이는 흥겨운 말춤과 장단으로 세계를 흔들고 다녀 한국인들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싸이가 뉴욕의 한복판에서 외국의 쟁쟁한 스타들을 제치고 미국인들 앞에서 번역되지 않은 한국어 노래 강남스타일을 불러제낀 일은 마치 12척으로 수백 척의 일본배를 격파한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게 한다. 화면을 통해 뉴욕교포들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얼핏 보였다. 그 좋은 날에 그 흥겨운 음악앞에서 웬 눈물? 하지만 한국인들은 그 눈물의 의미를 다 안다.
모방을 통해 오리지널을 창조
이제 싸이는 한국인의 설움을 한꺼번에 날려버린 뉴욕대첩의 영웅으로 기록될 것이다. 무엇이 한국인들을 그렇게 주눅들게 했고 무엇이 그동안 한국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던 것일까. 그건 바로 후진국으로서의 문화적 열등의식 같은 것이었다. 팝음악은 말할 것도 없고 영화, 패션, 거의 모든 대중예술이 서양에서 온 것이라는 문화적 열등감은 한국이 세계의 변방에 있는 작은 나라라는 왜소함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근대 100년을 보냈고 한국은 최근 수십년 사이 무서운 속도로 서구를 따라잡기 시작했다. 불과 20~30년전 머리에 노랑, 하양, 빨강 물을 들인 청소년에게 손가락질 하던 중년 기성세대들이 있었다. ‘나라가 어찌 되려고 저러나’ 혀를 끌끌 차며 걱정하던 어른들이 떠오른다. 급격한 서구화와 한국의 전통은 부딪혀 심한 파열음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김기덕이 보여준 것은 한국인의 전통 아리랑이었고 싸이가 보여준 것은 기특하게도 강남스타일이지 뉴욕스타일 파리스타일이 아니다. 이들을 통해 진하게 느끼는 것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평범한 진리. 역시 한국인의 피는 노랑 머리보다 진하다. 아무리 머리 색깔을 바꾸고 영어를 써도 한국인의 심성은 어디 가지 않는다. 알고보면 싸이의 노래나 춤은 서구와 한국적인 것이 뒤범벅된 퓨전이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교훈은 싸이의 성공과 관련이 없다. 오히려 한국적이지도 서구적이지도 않으므로 역설적으로 두 시장에 다 통하는 그런 퓨전으로서 성공할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인의 창조는 모방에서 온 것이다.
문화적 열등의식, 이제 벗어나자
영화 ‘광해’도 그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인터넷 한곳에서 표절 시비가 있긴 하지만 1천만 관객이 감동한 영화를 표절이란 잣대로 쳐내기엔 무력해 보인다. 어찌 보면 그런 표절 시비도 한국인의 문화적 열등의식에서 온 것이다. 서구 것은 항상 오리지널, 한국은 다 짝퉁. 이런 식의 공식이 우리 뇌리에 있다. 우리는 한동안 짝퉁으로 삶을 유지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모방을 통해 오리지널을 창조하는 시점이 왔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우린 이제 모방을 부끄러워 말고 당당히 말할수 있어야 한다. 서구가 아무리 싸이더러, 광해더러, “원조는 우리 것이야” 라고 한들 그 흥겨운 리듬과 그 벅찬 감동을 어찌 마다할 수 있으랴. 그 창조가 원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하늘은 평등하고 그 빛은 모두에게 비춘다.
정재형 동국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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