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기행을 떠나다] 4. 유배지서도 꿈에 그리던 고향 ‘초천’

유배중 ‘조선을 통째로 바꾸자’며 경세유포’, ‘목민심서’ 등 실학서 저술

1. ‘다산문학’은 인간학과 경학의 만남이었다

2. 밤남정 주막집의 두 형제이별

3. 강진·흑산도에서 만난 실학의 혼

4. 유배지서도 꿈에 그리던 고향 ‘초천’

5. 유네스코선정 ‘2012세계문화기념인물’

다산 정약용의 저작들을 읽어 가다보면, 마치 ‘대서사시’에 빨려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글 갈피에 뜨거운 애민(愛民)사상과 심오한 철학(哲學), 시문학(詩文學)의 얼개들이 오롯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 조선사회에 불어닥친 수많은 환난과, 개인은 물론 일가친지에게 불어 닥친 험난한 시련속에 또한 ‘유배의 몸’으로 다산은 공·맹을 비롯 동양사상연구를 망라하였다. 이를 기반삼아 경세학문의 경지에 오른 학자로, 위대한 저술가로 지고(至高)한 인생발자취를 남긴 다산선생의 ‘웅혼한 삶’ 앞에,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오늘도 숙연한 느낌을 감출 수 없게 된 이유다. 인간 ‘다산(茶山)’의 멋과 ‘다산학(茶山學)’의 오묘함이 거기에 숨어 있다.

■유배살이중 꿈에 그리던 고향 ‘소천’

유배살이 중, 다산의 시문(詩文)에 자주 쓰이는 용어가 고향마을 ‘소천(苕川)’이다. 쓰기와 달리 발음은 ‘초천’이며, 다산이 고향산하가 그리워 떠 올릴 때면 ‘내 고향 초천(苕川)…’하고 불려졌던 곳이다. ‘소내(牛川)’라는 표현도 곧잘 나온다. 소내 다음으로 ‘열상(?上)’이란 단어도 종종 등장한다. 한강 옛 이름이 ‘열수(?水)’이니, 한강 상류마을이라는 뜻으로 ‘열상’이라 한 것이리라. 현재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현마을’로, ‘마재’라고도 한다. 마현 자의 현(峴)이 ‘재’이기 때문에 마재로 불리운 것이다.

다산에게 고향 소천은 매우 중요하다. 귀양살이 중에도 머리 속에는 늘 꿈속처럼 소천마을이 맴돌 뿐만 아니라, 다산사상과 철학, 실학 등 다산학문의 최종산실이 그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강진의 다산초당서 다산학의 광맥을 발굴하였고, 학문연구의 토대를 구축한건 사실이지만 그동안 갈고닦은 학문경지와 인생경륜을 해배 후 귀향하여 마지막 완결시켰다는 점에서, ‘소천’은 유배지의 ‘다산초당’ 못지않게 아주 중요한 곳이 아닐 수 없다.

그렇듯 다산이 태어난 자연부락 마재, 소천마을. 강반(江畔)인 이 마을은 다산이 태어나 살고 마지막 75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 곳이다. 조선후기, 그나마 ‘역사의 서광’이던 실학(實學)이라는 불세출의 학문이 완성된 소천, 연구하고 사색하며 수많은 저서들을 정리하고 보관했던 이 곳은 우리 민족에게 오래도록 기념될 마을이다. 

■다산 인생역정은 ‘한편의 대서사시’

다산의 일생 가운데, 가장 극적인 반전을 꼽는다면 뭐니해도 ‘유배(流配) 길’에 오르는 대목일 것이다. 세상과 작별하고 극한 오지로 떠나는 운명의 갈림길에 선 탓으로, 다산의 시문(詩文)에는 한 맺힌 이별곡이 많다. ‘돌모루 이별’, ‘모랫들 이별’, ‘하담의 이별’ 등 ‘삼별시(三別詩)’가 대표적이다. 제목만 떠 올려도 가슴이 저며오는 주옥같은 이별가들이다.

다산에게 삼별시가 경상도 장기(포항근처)로 떠난 1차유배의 산물이라면, ‘밤남정 이별’(본보 기획특집 2회 10월 5일자)은 전라도 강진 땅 끝으로의 2차유배가 배태한 명시(名詩)다. 이들 시는 다산의 ‘유배문학 걸작선(傑作選)’이라 이름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문학은 불행의 나무에서 자란다’고 했던가. 다산에게 ‘유배’라는 불행의 시간은 ‘다산문학의 꽃’을 피워낸 결정판이었다. 1801년 2월, 유배길에 오른 비운의 다산은 ‘돌모루 이별(石隅別)’이란 시를 남기고 한양을 떠난다.

쓸쓸하고 처량한 돌모루마을

가야 할 앞길 세 갈래로 갈렸네

숙부님들 머리 수염 하얕게 세고

큰 형님 두 뺨엔 눈물이 그렁그렁

가자꾸나, 다시는 돌아보지 말고

마지못해 다시 만날 기약을 남기면서

-돌모루 이별(石隅別)-

돌모루라 하면 지금의 반포대교 북단 용산구 서빙고쯤으로, 한강변 마을이었던 것 같다. 그곳에 큰 바위가 있었기에 ‘돌모루’라는 칭호가 붙었을 법 하다. 다산은 신유년(1801) 2월28일(음력) 새벽, 이곳을 출발 경상도 장기로 끌려가는 길이었다. 이틀 전, 셋째 형 약종과 매형 이승훈이 한양성 서소문밖 형장서 참수형을 당한 직후였다. 평시 같았으면 이날 일가 친지들은 시신을 거두고 초상을 치러야 했겠지만 그럴 겨를마저 없었다. 신유박해 회오리에, ‘8대 옥당’이라는 명문집안이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일찍이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고위 벼슬을 지낸 다산과 약전 형제는 그나마 죽음을 면한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이른 새벽 돌모루에는 백발이 성한 집안 어른들과 일가친지들이 모두 나와 기약없이 떠나는 형제의 유배길을 배웅했다. 이 때의 한스런 심경을 담아 다산은 ‘돌모루 이별’ 이라는 시를 남겼던 것이다.

 

■‘돌모루 이별’ 등 삼별시는 ‘유배문학’의 새장

이어 다산은 돌모루 한강나루를 건너 모랫들에 도착했다. 다산기록에 의하면, ‘모랫들에서 아내와 아들을 이별했는데 한강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라고 씌여있다. ‘모랫들’은 지금의 반포대교건너 강남성모병원이 있는 중간쯤으로 추측된다. 한강건너 모랫들까지 아내와 아들들이 따라왔다. 어른들과는 강을 넘기 전 돌모루 마을에서 헤어지고, 차마 헤어질 수 없었던 아내와 두 아들은 강나루를 건너 그곳까지 따라와 석별의 한을 삭였던 것 같다.

다산은 이때의 심경을 ‘모랫들 이별(沙坪別)’ 이란 시에 생생히 토설(吐說)하고 있다. ‘산바람 가랑비 흩날려, 헤어지기 섭섭하여 머뭇거리듯 하는구나. 서성거린들 무슨 소용 있으랴, 끝내 이 이별 어쩔 수 없는 것을…’. 시 말미에, ‘어미소는 음매하며 송아지를 돌아보고, 암탉도 구구구 제 새끼 부르는구나’ 라며 비통한 소회를 덧붙이고 있다. 어미소도 송아지를 예뻐할 자유가 있고, 암탉도 병아리를 품에 안을 자유가 있건만,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남기고 생이별하게 되는 다산가의 비통함과 가슴을 에는 서러움이 담긴 시다.

다음으로, 충주인근 하담에 있는 부모님 묘소를 지나면서, ‘하담의 이별(荷潭別)’ 이란 시를 지어 애처러운 마음을 고해 바친다. ‘부모님이여 아시나요 모르시나요, 집안이 갑자기 무너져버려 죽고 살아남는 이 지경이 되었어요. 하늘같은 은혜 꼭 갚으려 했건만, 깎아버림 당할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언제다시 부모님 묘소에 성묘할 기회가 있으리라는 기약도 없는 죄인의 몸,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에 눈물 흘리며 비탄에 젖는 이별의 노래다.

이런 시문(詩文)을 예로들어 다산학문을 ‘인간학’으로 분류하는 학자도 있다. 애민사상이 절절이 흐르는 싯귀들이 많기 때문이다.「적성촌에서」라는 시를 보면, 가난한 18세기 말엽 조선의 참담한 농촌의 실정이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다. 탐관오리들의 관행도 신랄히 꼬집고 있다.

시냇가 허물어진 집 뚝배기처럼 누었는데

겨울바람에 이엉 걷혀 서까래만 들쭉 날쭉

놋수저는 지난번에 이장에게 빼앗기고

아아! 이런 집들 온 천지에 가득한데

구중궁궐 깊고 깊어 어찌 모두 살펴보랴

애오라지 시 한편 베껴 임금님께 돌아갈까

- 적성촌에서 (積城村舍作) -

1794년 10월, 암행어사로 적성군에 들렀을 때 찌든 농촌의 피폐상에 너무 마음아파, 이에 통감하는 시를 지었다. 그동안 풍광을 읊고 자연을 관조해 오던 다산 시는 이후 면모일신하여 사회의 비리와 구조악에 눈을 뜨면서 투철한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사회시로 변한다.

■ ‘조선을 통째로 바꾸자’며 경세유포 등 저술

다산의 낙담은 컸다. 조정에서 정조대왕의 측근으로 병조참의 등 고위벼슬을 두루 거칠 땐 바닥민생을 잘 몰랐다. 그러나 경기도 암행어사로, 참 목민관을 꿈꾸며 황해도 곡산수령으로 일하면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통절히 느끼고 매서울 비판과 통분의 글들을 남긴다.

하물며, 유배자의 시선으로 보는 조선사회의 실태는 더 황망했을 터였다. 이때 다산은 다짐한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통째로 바꾸는 길밖에 없다…’. 그 같은 정신으로, 유배살이 중 학문연구와 저작에 몰입하게 된다. 다산은 ‘세상을 바꾸자’는 목표 하에 ‘경세유포’를 저작하였고, ‘백성을 구제하자’는 계획하에 ‘목민심서’를 발간했노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공부하던 청소년기부터 한창 벼슬하던 30대, 그리고 긴긴 유배생할의 40~50대 저술기에 갈고닦은 온갖 학문의 종합으로, 유배말기 저작한 경세철학(실학)이야 말로 다산학문의 결산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글=구동수 (사) 다산연구소 연구위원 · 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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