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인 것 같아요. 여성이 기업 경영한다는 게 말이 쉽지….”
5평 남짓한 구멍가게를 연매출 70억원의 중소기업으로 이끈 여성경제인, 이정한 ㈜백양CMP 대표이사(51)의 첫 마디치곤 좀 뜻밖이다.
하지만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금속업체를 운영해 온 25년 남짓한 세월은 말 그대로 ‘산 넘어 산’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지나고 보니 좋은 기억만 남더라는 이 대표는 성공한 여성 CEO의 그럴듯한 이야기 대신 시종일관 기름기 하나 없이 짧고 솔직한 답변으로 일관했다.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업체를 탄탄하게 다져온 경영 노하우가 진솔함이라는 사실이 배어 나왔다.
햇수로 3년째, 한국여성경제인협회 경기지회장까지 맡으며 여성 경제인의 어려움 덜기에 나선 탓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어느 때보다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선선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9월 중순, 이 대표의 분 단위 스케줄을 쪼개고 쪼개 시흥시 정황동 시화산업단지에 위치한 ㈜백양CMP를 찾았다.
1989년 안산서 금속원자재 판매로 출발
작업장 곳곳에서 금속 철판을 갈고 닦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빨갛고 파란 불꽃을 튀기며 직원들은 저마다 업무에 몰입하고 있었다.
작업장 한편에 있는 사무실도 시끄럽긴 마찬가지. 서류를 잔뜩 쌓아놓고 업무 중이던 이 회장은 “대장간이죠, 뭐”라고 운을 떼며 익숙한 소음이 오히려 편안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백양CMP는 1989년 안산에서 첫발은 뗀 금속가공회사다. 말이 좋아 회사지, 비철·금속 등 원자재를 판매하는 도매상 수준으로 직원은 1명에 불과했다.
거래처에서 “판을 접어 달라”, “일부를 잘라 달라”는 주문이 끊이지 않자 원판을 가공하는 작업을 시작했고 10여 년 전부터 이 대표가 직접 마케팅을 시작하면서 업체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 덕에 손으로 꼽을 정도였던 거래처는 100여 곳으로 늘어났고 우량기업체와 거래하기 시작하면서 내실이 다져졌다. 현 직원은 43명, 지난해 매출 68억원으로 10년 만에 5배의 성장을 일궜다.
이력을 훑어보면 타고난 기업가 같지만 사실 이 대표의 꿈은 순수문학 작가였다. 글을 좋아하는 아버지 덕에 일찍부터 여러 책을 탐독했고 학창시절에는 글짓기 대회 상을 휩쓸었다. 고등학교 시절엔 노벨문학상을 타서 고향인 충남 아산 현충사 길을 카퍼레이드 하는 꿈을 꾸곤 했다.
70년대 후반 무협지가 성행하기 시작한 시기에 그녀는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와 무협지 출판사에 취직했다. 글 솜씨를 인정받으면서 당시 6만~7만원 선이던 공무원 월급의 4배 정도인 29만원을 급여로 받았다. 1년여 후 글쓰기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국립극장에 새로 일자리를 얻은 후 작가이자 연극연출가인 故 차범석 선생에게 7년여 간 드라마작법을 배우기도 했다.
결혼 후에도 직장생활과 작가 공부를 병행했지만 남편의 사업 실패가 되풀이되면서 어려워진 살림 탓에 꿈을 접고 직접 사업에 나섰다. 89년,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던 때였다.
“여성 기업가 중에 살림이 넉넉하고 가정이 화목한데 사업을 시작한 일은 거의 없어요. 다들 우여곡절을 겪고 또 평지풍파 속에서 떠밀리듯 시작하는 거죠. 그런데 환경이 그러니까 오히려 단단해지는 게 있어요. 힘들고 어려우니까 어찌 됐건 다져지는 거죠. 그 과정은 말로 다하기 어렵지만요”
어려서부터 가져온 꿈까지 접어가며 시작한 사업에 대해 이 대표는 자신의 말마따나 단단하고 겸허하게 답했다.
IMF에 거래처 줄도산 속 부도위기…신뢰 하나로 버텨
사업을 시작하긴 했지만 오는 손님만 받다 보니 매출 규모가 작아 아들 하나 키우기도 빠듯했다.
남편은 사업에 관심이 없었고 수줍음 많고 말수 적은 성격에 홀로 여러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남들보다 곱절은 어려웠다. 고집이 세고 참을성이 발군인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70kg이 넘는 철판과 파이프를 트럭에 싣고 직접 운전하는 것은 물론 금속을 자르고 굽히는 일도 해야 했다.
손이 베이고 멍드는 게 일상이었다. 직원이 퇴근하고 나면 5살 난 아들을 조수 삼아 일하던 시기로 수면시간이 4시간을 넘은 적이 없었다.
업체가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하던 97년, 갑자기 찾아온 IMF에 거래처가 줄지어 부도를 맞으면서 회사도 부도를 맞을 위기에 처했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다.
“더는 못 버티겠어서 바다를 찾은 적이 있어요. 뛰어들려는데 빚 갚으라며 돈을 빌려준 가족들, 예전 직장동료들이 떠올랐어요. 내가 죽으면 빚은 어떡하나, 이렇게 폐를 끼쳐선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돌아왔죠. 이제야 그 빚도 다 청산했네요”
그렇게 빚 지고는 못 사는 투철한 ‘사업 마인드’로 목숨을 건진 뒤 2000년대 들어선 직접 영업을 뛰기 시작했다. 당시 직원 수 10명, 연매출 10억원 안팎으로 늘었지만 기업이 그 이상으로 나아가려면 앉아서 오는 손님만 받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심차게 시작한 ‘공격적 마케팅’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미팅약속을 잡고 가도 외판원 취급을 당하며 30분이 넘게 기다려야 했고 “도면이나 볼 줄 아느냐”는 비아냥거림은 예사였다. 직원들 식사 준비를 하다 앞치마 차림으로 영업에 나섰다가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이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직원과 제품에 대한 신뢰였다.
“여성이라서 홀대받는 일은 아직도 비일비재해요. 남성 위주의 기업환경에서 어쩔 수 없는 현실이죠. 함께 일하는 직원을 믿고 제품의 질을 자신하지 못한다면 여성기업인으로서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처음 세일즈 할 때 “제품이 맘에 안 들면 돈을 안 받겠다”고 말하며 거래를 성사하곤 했어요. 그게 지금까지 온 거죠.”
그의 사업장엔 ‘불량제품은 만들지도, 납품하지도 않는다’는 현수막이 크게 내걸려 있다. 단가를 낮추고 납기일을 준수하며 제품을 잘 만든다는 철칙은 단순하지만 중요한 그의 경영 비결이다.
2014년 시화 MTV 단지로 확장 예정
㈜백양CMP는 2003년 ISO 9001 품질경영시스템과 ISO 14001 환경경영 시스템 인증을 받으며 품질과 환경경영에 대한 검증을 받았다. 또 2007년에는 기술혁신형 중소기업(INNO-BIZ)과 유망중소기업 인증을 받은 데 이어 2008년에는 기획재정부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2009년에는 건설업등록을 통해 공개입찰의 참여 기회를 얻게 되면서 활로를 점차 넓혀가고 있다. 2014년에는 현재 규모(2천58㎡)의 두 배 이상인 4천958㎡ 규모의 시화 MTV 단지로 확장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이 대표는 업체 경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여성경제인협회 경기지회장으로서 여성 경제인들의 권익신장을 위해 3년째 앞장서고 있다.
“남성, 여성 따져가며 경영하는 건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해요. 그 한계도 뚜렷하고요. 여성 경영인 업체의 제품을 살펴보면 섬세하고 꼼꼼한 여성 특유의 장점이 잘 살아나 있죠. 모두가 어우러져 같이 꿈꾸면서 불황을 타개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여성 CEO의 본보기로서 다른 여성 경영인의 견인차 역할까지 하는 이 대표. 20년이 훌쩍 넘는 세월동안 구멍가게를 유망 중소기업으로 일으킨 그의 눈빛에서 여성 기업이 하나둘씩 도약하는 앞으로의 20년이 보이는 듯했다.
글 _ 성보경 기자 boccum@kyeonggi.com 사진 _ 전형민 기자 hmjeon@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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