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인에게 농촌이란 일상의 터전과는 멀리 떨어진 공간적·정서적 거리감으로 다가온다.
그나마 농촌에 고향을 두고 일가친지들과의 왕래가 유지되는 경우는 이런 저런 대소사를 함께하는 계기라도 있다할 것이지만, 그 조차도 없는 이들에게 농촌은 필요에 따라 잠시 들려 머무는 객지일 뿐이다.
더욱이 사람과 자원이 빠져나가 고령화와 공동화의 늪에 빠진 농촌에서 뭔가를 도모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물론 이와 같은 현상이 우리네 농촌만의 일도 아니며, 소위 선진화와 도시화의 길을 걷는 모든 나라가 겪고 있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어디서건 농촌을 일으켜 세우려는 시도들이 나름 성과를 보기 위해선 사람과 자원의 유입이 관건이라 할 것이며, 그것은 곧 도시의 사람과 자원임은 쉽게 유추될 수 있는 일이다. 여기서 도농교류의 실질적 기대치가 그려지게 된다.
농촌 공동체 스스로의 자생력과 내발성을 강조하는 주장도 그 타당성이 충분하다 할 것이나, 그것은 좀 더 긴 호흡의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보니 당장의 삶을 채워줄 방도로써 도농교류를 통한 실효적 방편을 찾아보는 일 또한 마다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막상 도농교류 프로그램의 구상을 엮다보면 뭔가 서로를 대상화하고 있다는 혐의를 지울 수가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본다면 농촌은 언제나 생태문화적 체험의 대상이고 도시는 그에 대해 지갑을 열 대상이 되고 만다.
도시·농촌의 수평적 교류 필요
그렇다면 도시와 농촌의 수평적 교류 협력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인적, 물적 기반을 전제로 한다면 딱히 다른 방도를 찾긴 어려울 것이나, 상상력의 진폭을 달리 해 볼 수는 있겠다. 도시와 농촌이란 자연과 사람이 엮여서 돌아가는 삶의 공간이다. 그러기에 도시와 농촌은 그 안에 자연과 사람의 기억이 담겨있다. 그것은 삶의 지식이나 지혜이기도 하다.
거기엔 공간의 크고 작음이나 사람과 자원의 많고 적음은 그리 중요한 변수가 아니고, 그에 따른 우열의 가늠도 따질 일은 아니다. 도시와 농촌이 서로 품고 있는 기억과 지식, 지혜를 나누고 눈높이에서 마주볼 수 있다면, 서로의 대상이 아닌 동반자로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도시와 농촌은 스스로의 기억을 가꿀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도시는 조금 느려지고 농촌은 조금 채워져야 한다. 도시의 삶이 이다지도 빠르다면 어느 누구도 스스로의 기억을 추슬러내기 힘들 것이다. 또한 농촌의 비어있음은 단지 사람과 자원만이 아니라, 기억의 비어있음이 더욱 문제다. 사람과 자원은 언제든 돌아오고 채워질 수 있지만 한번 잊어버린 기억은 다시 찾기 어렵다.
삶의 지식·지혜 나누자
도시와 농촌이 스스로의 기억을 찾았을 때 거기서 서로의 이야기는 시작되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인적, 물적 기반을 넘어서는 도농교류의 다른 모양새를 그려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농촌 공동체의 자생력과 내발성 역시 이야기의 힘을 통해 갖춰지고 들어낼 수 있게 된다. 공동체주의 이론의 한축을 대변하는 매킨타이어는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다.
우리는 서사적 탐색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려면 그전에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도농교류의 새로운 지평을 궁리하면서 그의 말을 다시금 음미해 본다.
박명학 예술과마을 네트워크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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