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의 황소

곧 3·1절이다. 93년전 이 땅에는 꽃바람보다 먼저 피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눕는 풀처럼 사람들이 쓰러졌다. 시인 김수영의 ‘풀’처럼 바람보다 빨리 눕고 바람보다 더 빨리 울었으나 바람보다 먼저 일어났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쓰러지고 일어나 그들은 온 산하에 들풀을 키웠다. 우리는 그 들풀의 정신이 해방과 전쟁 이후 민주화로 이어졌던 것을 또한 기억한다.

 

식민의 시대를 끝내고 해방의 순간들을 마주했을 때 이중섭의 ‘소’는 빛났다. 어린 시절부터 소에 미쳤던 중섭은 커서도 소에 미쳤다. 미쳐서(狂) 미친 것(及)이 탁월한 ‘소의 미학’이다. 소를 워낙 좋아해서 소와 입맞춤한 아이라고 소문이 났고, 후일 소의 튼튼한 육체와 동세를 탐구해 민족혼과 민족미학을 합일하려 했던 그가 들에서 소를 그리다 소도둑으로 오해받았던 것은 그냥 웃어넘길 일화가 아니다. 이중섭의 많은 그림이 사라졌고 또한 망실되었으나 여전히 많이 남아있는 것이 소그림이다. 그 중 ‘황소’는 압권이다.

 

1953년경, 전쟁의 폐허를 지켜보며 그린 32.3x49.5cm의 이 작은 그림은 예술과 사회에 대한 작가의 뜨거운 시선이 녹아 있다. 그는 파괴된 영토에 다시 떠오를 뜨거운 태양을 생각했을 것이다. 해돋이의 붉은 하늘빛을 배경으로 황금 빛 황소의 힘찬 울부짖음은 바로 그것을 상징할 테니까! 스키타이 황금문명이 유라시아 초원을 건너와 이룩한 한반도의 고대 황금문명처럼.

 

그러나 이중섭은 그 해 임시 선원증으로 일본에 건너가 6일간의 짧은 가족상봉을 했을 뿐 돌아 와서는 통영으로 대구로, 서울로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며 그림을 그려야 했다. 가난하고 궁핍했다. 1916년 용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이중섭은 1956년 봄에 청량리 뇌병원에 입원했고 퇴원했다. 정신이상 증세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해 9월 숨을 거뒀다. 그는 갔고 예술은 남았다.

 

김종길 미술평론가·경기도미술관 교육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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