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 249주기 기신제

지난 6월 22일(음력 오월 스무하루)은 1762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지 여드레째 되어 돌아가신 날이다. 성정이 격하신 어른이 얼마나 갑갑하셨을까, 존귀한 세자의 몸이 뒤주속이라니… 당쟁에 희생된 게 얼마나 원통했을까, 문무를 겸비한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세지재의 웅지를 펴지 못한 채 그렇게 돌아가셨다.

 

하지만 아버지 영조 임금이 진심으로 아드님 세자를 죽일 생각으로 뒤주에 가뒀다고는 믿고 싶지 않다. 세자를 둘러싼 당쟁에 중신들의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진짜처럼 그랬던 것이 그만 주검을 가져온 것으로 안다. 난 역사학도는 아니지만 그렇게 확신한다.

 

오월 스무하룻날, 효찰대본산 용주사 대웅전 앞 광장에서 사도세자 249주기 기신제가 거행된 것은 그날 오후 7시다. 용주사와 정조대왕기념사업회, 경기문화연대가 봉행한 기신제다. 그 자리엔 채인석 화성시장 등 관계기관 인사 및 시민 1천여 명이 참석했다.

 

훗날 사도세자의 한을 불세출의 효를 다해 풀어드리고 조선 후기를 계몽군주로 꽃피운 이가 아드님인 정조대왕이시다. 그 정조 임금의 음덕이었을까, 그토록 내리던 비가 제향 시작이 가까워지면서 뚝 그쳤다. 이윽고 국보 120호 용주사 범종의 은은한 명종으로 봉행이 시작됐다. 스님들의 청아한 청혼 독경이 목탁소리와 함께 대웅전 너머 송림사이의 융릉 능침으로 울려 퍼졌다. 능침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부부가 합장됐다.

 

정조대왕이 아버지를 추모한 한문시에 풀이하면 이런 시가 있다.

 

‘혼정신성 다하지 못한 어버이 사모하여 / 오늘 또 화성을 찾아와 보니 /원침엔 가랑비 부슬부슬 내리고 / 재전에서 배회하는 그리운 마음 깊구나.’

 

또 이런 시도 있다. ‘사흘 밤 견디기는 어려웠으나 / 그래도 초상화 한 폭은 이루었다네 / 지지대 돌아가는 길에 머리 들어 / 벽오동 같은 구름 바라보니 속마음 일어나누나.’

 

정조 임금이 친히 판각에 올려 신축, 백성들에게 보급하도록 한 ‘부모은중경’ 봉독에 이어 한참 동안 지역사회 각계 인사의 경건한 분향 재배가 진행됐다. 추모 공연은 어이하여 애를 끓는 듯 그토록 애절했던지 모두가 숨을 죽였다. 용주사 합창단이 부른 추모의 노래와 오색조명 가운데 펼쳐진 승무의 춤사위는 온 가람에 숙연함이 가득했다.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이는 정조대왕의 어의(御意)다. 즉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재궁으로 대웅보전 옆에 호성전을 건립해 위패를 모시게 했다. 이 같은 효찰대본산 용주사의 사도세자 기신제는 기실 정신문화의 지주다. 효가 인성의 근본으로 인간의 불변적 가치라면 기신제 봉행은 곧 시대를 초월한 전래 고유의 정신문화인 것이다. 학생교육, 공직교육, 사회교육 등으로 널리 선양되어야 한다.

 

용주사 주지 정호 큰스님은 “우리에게 큰 문화유산으로 남겨주신 정조대왕의 효행을 중생이 본받아 밝은 사회가 되길 바란다”며 “용주사와 융·건릉 주변을 효테마 공원으로 조성하여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효테마공원 조성을 위해 지역사회가 새로운 인식으로 힘을 합쳐야한다는 것은 박천복 경기문화연대 상임대표의 말이다.

 

사도세자 기신제를 마친 것은 약 두 시간이 지난 밤 9시경이다. 대웅전이 빛났다. 용주사 가람 만당에 서기가 감도는 듯했다.

 

이지현  경기문화연대공동대표·9대 혜경궁 홍씨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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