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행위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 중 하나이다. 그래서 복잡하고 추상적인 다른 영역의 행위나 경험을 가장 원초적인 행위인 ‘먹는’ 행위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뇌물이나 돈을 먹는다’처럼 ‘받는’ 행위를 ‘먹는다’고 한다. ‘욕을 먹는다’고 하듯이, ‘듣는’ 것도 ‘먹는다’고 할 때가 있다. 그냥 ‘가진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수수료를 먹는다, 이자를 먹고 산다, 남의 물건을 거저 먹으면 되느냐’하고 말한다. 일등을 ‘차지한’ 운동선수는 ‘나 일등 먹었어!’라고 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는 많은 행위나 경험에 대해 ‘먹는다’고 하는데, 심지어 우리말에서는 나이도 먹고, 더위도 먹고, 겁도 먹고, 마음도 (굳게) 먹는다. 말 한 번 잘못 꺼냈다가 상대방에게 한 방 ‘먹는’ 경우도 많다.
수많은 행위·경험 ‘먹는다’고 표현
원래는 음식이 아닌데 먹을거리로 만들어서 ‘먹는다’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외국의 풍물을 접했을 때 ‘외국물’을 먹었다고 하고, 눈치를 본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눈칫밥’을 먹는다고 한다. 이처럼 수많은 행위나 경험을 먹는 행위로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 한국어의 특성이고 한국인의 사유방식이다. 예들을 좀 살펴보자.
우선 ‘엿을 먹는다’는 표현이 있다. 이런 일을 당하면 곤란해진다. 물론 남에게도 ‘엿 먹이는’ 일을 하면 안 되겠지만. 그리고 남에게 피해가 안 갈지 모르지만 그래도 본인에게는 매우 해로운 ‘약’도 먹으면 안 된다. (너 약 먹었냐?) 또한 아무리 영양이 풍부하다고 ‘콩밥을 먹어서는’ 안 된다. 이거 먹게 되면 반드시 나중에 ‘두부도 먹어야’ 하니까 꽤 번거롭다. 또 무슨 일을 할 때에 절대 ‘김칫국부터 먹으면’ 안 된다. ‘골탕을 먹는’ 일도 피해야 할 것이다. 골탕이라는 음식을 파는 곳은 없지만. 일을 하다가 ‘물 먹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나 완전히 물 먹었어) 한편 아무리 고기를 좋아해도 ‘까마귀 고기를 먹으면’ 회사에서 환영 못 받는다. 입사시험이나 승진시험에서는 결코 ‘미역국을 먹으면’ 안 된다. 물론 생일날에는 예외다. ‘기차화통을 삶아먹는’ 것은 때와 장소를 가린다면 크게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자기한테는 이롭지만 남에게는 엄청난 해를 주는 그런 음식들도 있다. 남의 등을 쳐 먹는다든지, 남의 등골을 빼 먹는다거나 빨아먹는 행위, 그것도 부족해서 간을 빼 먹는 행위, 모두 나쁘다. 엽기적이지만(?), 누구의 껍데기를 벗겨 먹는 행위도 삼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몸담고 있는 회사를 ‘말아 먹는’ 것도 무척 곤란하다. 하지만 반대로 상대가 너무 많은 희생을 강요하거나, ‘이거나 먹고 떨어져’ 할 때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누군 ‘땅 파먹고’ 사는 줄 알아?
한국인 만의 은유 표현 유독 많아
이상에서 나온 음식들과 달리 나쁘지 않은 것도 있기는 한데, 예를 들어 ‘떡국을 먹는’ 것이다. 하지만 혼기가 찬 사람들한테는 별로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닐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빨리 국수 좀 먹게 해 줘’라고 한다. 이 국수처럼 기분 좋게 먹을 수 있는 것은 없을까? 물론 있다. 고생 고생하다가 ‘밥술깨나 먹는’ 것은 좋은 일이다. 또 공무원이 되어서 ‘나라의 녹을 먹는’ 것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쓰임이 종종 부정적이다. ‘밥술깨나 먹는다고…’, ‘나라의 녹을 먹는 놈이…’처럼 말이다. 또 항상 반어적으로만 쓰이는 표현도 있다. ‘잘 먹고 잘 살아라!’
하지만 매우 좋은 음식도 있다. 우리 다 같이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렇다면 왜 한국어에는 이렇게 먹는 행위에 의한 은유 표현이 많은가? ‘분필가루 먹고’ 사는 필자에게는 하나의 숙제다.
박만규 아주대학교 불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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