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교 100년 맞은 이천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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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도 입시 꼬마가 재수·삼수

 

1911년 ‘사립이천보통학교’ 문 열어

이천초등학교는 1903년에 이천읍 소녀들을 위해 미국 감리교 여선교부에서 ’매일학교‘로 설립하였고 1904년에는 이천읍 소년들을 위한 ‘특신학교’로 세워졌다 특신학교는 지역인사들이 학교설립을 추진하게 됨에 따라 교회에서 벗어나 독립학교가 되었는데 이름도 지성학교로 개명하게 되었다.

 

식민지시기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공교육 체제 강화에 따라 전국의 모든 군과 면에 한 개 이상의 초등교육기관을 수립한다는 이른바 일군일교, 일면일교정책이 추진되면서 기존 조선인의 사립교육기관들이 대대적으로 공교육체제에 편입하게 되었다.

 

지성학교는 1911년 5월 17일 드디어 근대 초등 교육기관인 『사립이천보통학교』로 창립 개교하게 되었고, 개교 9개월 만인 1912년 2월 15일 국가로부터 정식 교육기관으로 인정받은 공립학교로 편입, 인가를 받는다. 이로써 이천초등학교는 이천지역에서 인가받아 현존하는 최초의 공교육기관의 첫 발을 내딛게 된다.

 

일제 강점기 당시는 초등학교도 입학시험을 보았다 한다. 시험에 떨어지면 재수, 삼수를 하기도 했다. 이천보통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교육에 대한 열망은 높아졌지만 학생을 수용할 학교와 교실이 부족하였다.

 

이천보통학교의 경우 학교주변의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른 ‘리’나 ‘면’에서도 입학하고자 하는 경우는 많았으나 모집정원은 160명 정도이었다.

 

당시의 초등학교는 6년제와 4년제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이천보통학교는 1920년 수업연한이 6년으로 늘어나면서 이천의 유일한 6년제 학교였기 때문에 더욱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총독부가 재정 부족을 이유로 들면서 보통학교를 충분히 증설하지 않은 것도 입학난에 한 몫을 하였다.

일제시대 여학생 ‘조선독립’ 낙서로 발칵

일제 말엽(1938년~1943년 중)에 이천보통학교의 학급은 80명씩 3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학급의 명칭은 ‘이’,‘료’,‘하’ 라고 지었으며 학급의 일본 말인 ‘구미(組)’라는 말을 붙여 사용하였다.

 

30회 졸업동문들이 다니던 시절에는 ‘이구미(남자반)’는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설치되어 있었고, ‘하구미(혼성반)’반은 신둔, 백사, 부발, 대월, 호법 등 4년제 보통학교에서 전학 온 학생들이 다니던 반이었다.

 

‘료구미(여자반)’는 여학생들이 수업을 받았다. 이후에 학교가 신설되면서 남녀혼성 반이 되었지만, ‘료구미’는 오로지 여자들만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오후반이 생기기도 하였는데 ‘하구미’만 오후반이 생기게 되었다. 오후반 하구미반은 학령기가 2~3년 지난 나이의 사람들이 모여 공부하는 반이었다.

 

이천초등학교는 100년 역사를 정리하며 기록을 찾던 중 뜻 깊은 본교 내 일제 저항 사건이 있었음을 발견한다. 다름 아닌 소위 ‘國本仁秀, 利川公立國民學校 兒童 不穩言動에 관한 사건’ 과 ‘불온 낙서 사건’이 그것이다.

 

‘불온 언동에 관한 사건’은 본교에 재학 중이던 여학생 국본인수(國本仁秀) 즉 이인수(李仁秀)학생이 ‘조선 독립’이라는 말을 입에 올린 사건이며 이것이 일본인 학생에 의해 발각되어 이천경찰서로부터 조사를 받고, 여주 지청을 거쳐 경기지방법원 검사에게까지 보고된 사건이다.

한국전쟁 어린 목숨 앗아가 학생수 급감

1960년대의 본교 학생들은 1950년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태어난 이른바 6.25세대들이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전란의 포화에 휩싸이면서 가장 절박했던 것은 생존이었으므로 자연적으로 출산율은 저하될 수 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1.4후퇴 등으로 인한 피난 중에 태어난 갓난아이들의 울음소리는 피아를 막론한 군인들로부터 성인의 생명을 위협하는 소리였기에, 숨 죽여 숨어있는 와중에 특히 북한군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하여 아이의 입을 틀어막다가 질식하여 죽거나 심지어 일부러 죽이는 일까지 벌어지게 된다.

 

이로 인해 이 시기의 인구가 눈에 띄게 감소되어, 1949년부터 1952년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이 학령기에 도달했을 때에는 본교의 학생수도 대폭 줄었다.

 

물론, 여기에는 1955년 남천(이천남)국민학교의  분리개교의 영향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전쟁이 낳은 또 다른 비극이라 볼 수 있다. 남천국민학교는 55년도에 개교되었지만 마땅한 교사를 마련하지 못해 한 동안 현재 분수대로터리 부근 농협창고자리에서 천막을 치고 공부해야 했는데, 이 때문에 ‘남천 남천 거지떼들아, 깡통을 옆에 차고 이천학교로~’하는 노래가 60년대에 걸쳐 본교 학생들 사이에 유행했다 한다.

이천=임병권기자 limbk1229@ekgib.com

 

[interview] 박인오 이천초교 총동문회장

"발품팔며 자료 수집   100년사 발간 뿌듯"

선후배들의 도움 너무 고마워…

Q       100주년을 맞는 소감은?

A       감회가 새롭다. 자랑스런 모교를 개교 이후 근 50년 동안을 이천 시내의 유일한 초등학교였다는 당연함과 자신이 태어난 해와 졸업 횟수가 같다는 점등으로 인해 애교심으로 뭉치는 동문회 보다는 동년배들끼리 어울리는 모임에 더 애착을 갖고 활동했던 것도 사실이다.

마치 늘 있어 그 듬직함을 잊어버린 아버지의 등처럼 혹은 매일 숨 쉬는 공기처럼 그 존재 자체가 너무도 당연해 모교에 별다른 애정 표현도 특별한 연민의 정도 주지 못한 채 무심히 방치한건 아닌지 이번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하면서 몇 번을 반성했는지 모른다.

 

Q       이천초교100년사를 편찬 했다는데.

A       이천초등학교100년사를 편찬하는 마음은 더 애뜻하였음을 밝힌다. 제2차대전과 한국전쟁 와중에 모두 소실된 사료 하나하나를 새로 발굴하는 마음으로 선배들을 찾아 인터뷰하고 가슴 뭉클함도 느꼈다.

일면식도 없지만 100주년 때문에 고생이 많다는 동문의 격려에 감동도 받고, 처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 나름대로 정성껏 정리한 것이기에 100년사 편찬은 참으로 값진 사업이라 생각 한다. 100년사 발간을 기점으로 “찾아오는 명문교육 도시 이천“의 희망으로 거듭 나게 될 때까지 3만 동문 모두가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을 약속 하며, 그간의 모든 동문께 성원과 후원에 거듭 머리숙여 감사할 뿐이다.

 

Q       앞으로의 계획은?

A       우리 총동문회에서는 학교 역사관의 조성과 동문들의 학교교육 참여를 장단기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동문으로 구성된 교육 지원단을 확보해 주기적인 재학생 후배를 대상으로 한 강의와 교육 봉사활동 등을 펼칠 예정이다.

이로인해 예비동문인 재학생들에게 애교심과 애향의식을 고취함으로서 향후 모교의 교육 발전을 위해 순환 투자를 할수 있는 동기를 부여할 계획이다. 뿐만 아니라 장학부조 사업도 확대 나가는 것은 물론, 향후 동문 발전을 위한 과제를 속 속 발굴해 이천남초등학교가 교육의요람으로 자리메김 할수 있도록 동문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협조 부탁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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