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급식, 유상급식, 외상급식

지난해 정치권의 최대 화두는 무상급식이었다. 여기에 더해 서울시는 친환경 무상급식이다. 내 돈(私財)이 아니니까 학생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앞뒤 가리지 않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전국적으로 친환경 농산물의 생산량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인지 도대체 신뢰가 가지 않는다. ‘고상한 이념’과 ‘현실’ 간의 괴리이자, 정치인의 자질 개선은 백년하청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수직적 권위 시대가 가고 수평적 사고의 시대에는 화분의 꽃이 되기보다는 거름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앞뒤 안 가리고 뱀의 혀처럼 말하는 달변인지도 모른다.

 

국가 예산은 일정기간(보통 1년)동안 정부의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한 재정수입과 지출계획을 의미한다. 이 때 재정 수입이라 함은 대부분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 된다. 지출의 우선순위는 경중완급(輕重緩急)에 따라 집행 되어야 함은 재정학의 ABC이다.

 

그런데 지난 10년 간 햇볕정책이 파놓은 ‘계급의골’을 메울 때까지 ‘노랑풍선’은 망령처럼 한국 사회 곳곳에 부유(浮遊)하고 있다. 급기야 교육계까지 오염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차제에 급식뿐 아니라 의복, 주거까지 다 국가가 책임지라하면 어쩔것인가.

 

인구의 10%는 세상을 바꾸기엔 너무 적고, 무시해 버리기에는 너무 많은 숫자라고 한다. 10%가 골치 아픈 존재라면 그것은 국가적으로 불행한 일이다.

 

가톨릭에서 과식은 ‘7대 죄악’ 중의 하나에 포함된다고 한다. 여기에서 과식이라 함은 식생활의 과식뿐 아니라 마음의 과욕까지 정치인들의 예산을 고려치 않은 과한 공약까지 말하지 않나 싶다.

 

요즘 학교급식의 해법을 보면 마치 임진왜란을 앞둔 동인과 서인의 분열, 병자호란 전후의 척화파와 주화파의 분열, 개화기 때의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분열을 보는 듯하다.

 

교육에 교육논리보다는 정치논리가 우선하면 ‘무늬교육’으로 전락되어 국가적으로 불행한 후과를 감당해야 한다. 언제부터 교육에 그리 많은 관심을 갖고 초·중등 학생들을 위해 헌신했는가. 정의의 홍수 속에 사회 전체가 떠내려가고 있는 느낌이다.

 

바둑에서 9급 10만명의 훈수는 9단 한 사람의 혜안을 못 당한다고 한다. 9단의 혜안을 가진 진정한 교육자와 원로가 우리나라에는 없는 것인가, 아니면 침묵하고 있는가.

 

급식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국민의 세금을 더 걷어야 된다면 납세자(국민) 입장에선 유상급식이라 해야 더 타당할 것 같다. 그리고 지방정부가 예산이 모자라 국채나 지방채를 발행하여 급식예산을 충당한다면 그것은 외상급식이 아닌가. 따라서 무상급식은 원초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일부 정치인의 이상주의적 레토릭(修辭·수사)에 불과하다. 정해진 예산에서 급식예산이 늘면 다른 예산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풍선효과의 구조다.

 

교육자치와 일반자치가 이원화된 현실에서 국가예산 집행의 비능률과 중층·복층 낭비 요소 사례가 너무 안타까울 뿐이다.

 

학교운영비를 포괄하여 배정하면 각 학교의 특성에 맞게 학교와 학부모가 상의하여 학생들 급식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학교의 자율성 측면에서도 더 부합될 것이다. 이후, 수익자 부담이던 무상이던 직영이던 위탁이던 도시락이던 학교자율에 맡기는 것이 소모적인 논쟁을 끝내는 지름길이라고 본다.

 

김기연 한국초등교장協 홍보위원장 여주점동초등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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