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돌아보고 새해 기약하는 데도 제격
싸늘한 기운을 안고 떠난 여행길. 그날따라 날씨마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잔뜩 찌푸린 하늘을 뒤로하고 과천·의왕간 고속화도로를 벗어나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를 따라 양평으로 진입하는데만 2시간이 넘게 걸렸다. 오후가 다 돼 도착했을 때는 이미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빗방울이 굵어질대로 굵어져 차에서 내리기가 겁이 났다. 그래도 와이퍼 너머에 펼쳐지는 경치는 입을 다물지 못할만큼 매혹적이었다.
어머니 젖무덤같다는 우리네 신토불이 산(山)이 마치 겹겹이 싸맨 치맛폭처럼 너울거리고 그 사이로 피어나는 운무(雲霧). 부끄러운 듯 자태를 드러낸 산세 너머로 피어나는 안개는 마치 무대 위 배우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 셀렘을 표현하듯 보드랍고 기묘했다. 손을 뻗치면 금세 만져질 것 같은 운무 사이로 조용히 머리를 내민 것은 바로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여행의 목적지, 두물머리였다.
이미 기자보다 한 발 앞서 도착한 관람객들은 궂은 날씨에도 삼삼오오 우산을 받쳐들고 드라마와 영화 로케이션장으로 유명한 나루터 근방 30m 높이에 장정 셋이 팔을 뻗쳐야 닿을 만한 우람한 은행나무 풍경 속에 자신들의 모습을 끼워넣느라 분주했다.
추운 날씨에 비까지 내려서인지 덜덜 떨리는 턱 밑으로 진하게 풍겨나오는 커피향이 그 어느 때보다 달콤하게 후각을 자극했다. 나무판자로 옷을 입히고 가게명까지 나무를 그대로 이어 붙여논 간이 카페서 달큰한 커피로 목을 채우며 잠시 비를 피하자 우산 너머 보지 못한 산세며 점 콕 찍어놓은 듯한 러브호텔까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모텔건물들이 예전에는 주막거리서 주린 배를 채우며 훌훌 넘기던 국밥 한 그릇에 기름칠 번지르하던 파전 한 입에 알싸한 막거리를 들이키던 주막이었다는 것을 상기하자, 점점이 박혀있는 모텔들이 경관을 해친다며 못마땅하다던 소설가가 떠올랐지만 금강산서 내려오는 북한강물이 325km, 오대산 물이 흘러오는 남한강물 394km이 만나 골을 만드는 곳, 물길을 내고 배를 불러들여 뱃길을 따라오는 사람을 모으고 사람이 모여 이야기를 만들어냈으니 그 속에 사랑과 애증이 섞인들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1973년 팔당댐이 생기면서 서울로 드나들던 뱃길은 자동차가 대신했다. 이 곳 강가는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돼 50여가구가 살던 마을도 5가구로 줄어들었다. 나루터 마을의 흔적이라고 하기에는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포구는 명성만 남았지만 하루에도 수 많은 사람들이 두물머리의 절경을 담기 위해 이 곳을 찾으니 확실히 땅기운이라는 것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새해의 소망을 풀어내 보겠다는 당초 계획과는 무관하게 흘러가는 강물 앞에 정처없이 넋두리를 늘어놔야 할 것만 같은 전경은 1년을 마감하는 12월, 연말연시의 흥청거리는 홍수속에 갈피 못잡는 여행객의 마음길을 조용히 놓아주는 듯 했다.
먼 옛날 일상을 벗어나 타지에서 묵는 하룻밤의 여정은 왔던 길을 풀어주고 다시 밟고 가야할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였다. 두물머리 마을 근방에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성혈이 선명히 그어져 있다는 양평군 문화관광해설사 이영화씨의 해설처럼 길에서 길을 찾는 이 곳은 지나간 해를 돌아보고 맞이하는 새해를 열어보는 나침반이기도 했다.
모든 세상의 기준점, 북쪽을 향해 먼 길을 재촉하며 뱃길 노잣돈을 사공손에 쥐어주던 그들의 희망처럼 인생사 희노애락을 노잣돈으로 만사형통의 염원을 새기며 귀로의 키를 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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