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쌀쌀해진 날씨에 아침마다 코트 깃을 단단히 여미며 종종걸음으로 사무실에 출근한다. 책상 위에 놓인 탁상달력을 들여다보며 ‘아, 벌써 11월 중순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11월17일 옆에 작은 글씨로 새겨진 ‘순국선열의 날’이란 글씨가 문득 눈에 들어온다. 사람은 자신과 관계되는 일이 아니면 관심을 갖게 되기 힘든 것 같다. 어느 해 달력에든 11월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라는 글씨가 있었을 텐데, 보훈공무원으로 일하기 시작한 올해에서야 처음으로 그 글자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게 되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순국선열의 날에 대해 생소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나 또한 보훈공무원으로 일하기 전까지는 순국선열이라는 용어 자체가 낯설고 생소하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순국선열의 날이 제정된 배경을 알게 된다면 낯설게만 느껴졌던 그 말이 좀 더 가깝게 다가오고, 어쩌면 탁상위의 달력을 바라보며 오늘의 내가 누리는 풍요로움에 감사함도 느낄 수 있는 잠깐의 여유가 생겨날 지도 모르겠다.
1905년 11월17일 을사보호늑약이 체결돼 일제에 사실상 국권을 빼앗기게 되자 이날을 전후하여 수많은 선열들이 비분강개해 순절하거나 의병항쟁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던졌고, 이들을 기리기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이날을 ‘순국선열공동기념일’로 정하여 기념행사를 거행하였다. 1945년 광복이후에는 순국선열단체에서 민간주도로 기념식을 거행하여 오다가 1997년 5월9일 뒤늦게나마 정부에서 이날을 법정기념일로 정하였던 것이다.
‘순국선열’은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부터 1945년 8월14일까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항거하다가 순국한 의사, 열사를 뜻한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해준 고마운 분들을 가리키는 용어가 이처럼 낯설게 느껴진다는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에서 작년에 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 30%, 청소년의 47%가 6·25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를 모른다고 한다.
예전에는 이런 조사결과를 보면 ‘설마 그럴까…’ 하는 생각을 가졌었는데, 올해 중학교3학년과 고등학교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청소년 보훈캠프를 진행하면서 설문조사를 해보니 정말로 많은 수의 청소년들이 6·25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를 모르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었다. 반세기 전의 6·25전쟁이 이렇게 잊혀져가고 있으니, 한 세기 전의 순국선열들이 이토록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순국선열의 날과 같은 기념일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평소에는 바쁜 일상에 휩쓸려 좀처럼 생각하기 힘든 것들을 단 하루, 아니 단 몇 분 몇 초만이라도 곰곰이 생각해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던져주니 말이다.
올 한해는 특히나 ‘국가보훈’의 의미가 더더욱 부각되는 시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안중근의사 순국 100주년, 4·19혁명 50주년, 5·18민주화운동 30주년, 6·25전쟁 60년, 경술국치 100년 등 10년 주기 보훈기념행사가 연달아 있었고, 천안함 침몰사고로 순직한 젊은 장병들과 유족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바라보며 온 국민이 함께 목 놓아 울기도 했으니 말이다.
너무나 다사다난했던 2010년의 마지막 끝자락을 걷고 있는 오늘, 쌀쌀해진 날씨와 고단한 업무에 하루 종일 종종걸음 치느라 지쳤을 몸과 마음을 잠시라도 쉬게 하며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해준 순국선열들에게 잠시나마 감사하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 신아람 인천보훈지청 보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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