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관공서 등의 기관이나 회사 등에 전화를 걸어 문의를 하거나 민원을 제기하면 언짢게 통화를 마치는 경우가 꽤 있다. 가벼운 말다툼을 벌이게 될 때도 자주 있다. 그래서 급기야 좀 친절하게 대할 수 없냐고 따져 물으면, 인원이 모자라고 하루에도 수십 통씩 이런 전화를 받아서 짜증이 안날 수 없다는 식의 대답을 하고 오히려 거꾸로 이해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업무여건이 불비한 것은 업무처리의 지연과 비능률화를 변호해 줄 수는 있지만, 불친절을 정당화시켜 줄 수는 없다. 이러이러하다면 내가 친절할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조건이 만족되지 않는다면 나는 친절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식의 논리는 정당하지 않다. 친절을 베푸는 데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어야 할 것이다. 설령 내가 베푼 친절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느낌이 들어도 서운해 해서는 안될 것이다. 마치 사랑이 실패하더라도 내게는 최고의 기쁨으로 남게 되듯이, 친절도 그러한 것이다. 또한 베푼 친절에 대해 어떠한 반대급부를 바래서도 안될 것이다. 친절의 대가는 다만, 친절을 베푼 뒤 생기는 훈훈한 마음, 즉 자기 만족과 또 다시 친절을 베풀 수 있는 더 큰 관용의 생성일 뿐이다.
친절 베푸는데 조건 있어선 안돼
이같은 ‘친절의 조건화’와 함께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친절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친절의 2원화’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친절을 아랫사람, 대민부서 직원, 영업직 종사자, 판매직 종사자 등에만 요구되는 덕목으로 개념화해서 소위 윗사람이나 경영자, 관리부서 직원 등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거나 적어도 해당되지 않는 것이라고 우리는 흔히 생각한다. 그래서 평사원은 친절한데 임원이나 사장은 불친절한 경우, 또 대민부서 공무원은 친절한데 상급직 공무원은 불친절하거나 때로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는데, 이를 우리는 별로 저항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다. 우리나라 사회가 오랫동안 계층적인 사회구조를 유지해 왔고 그 틀 내에서 인간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친절이란 근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이고 이는 종국적으로 사회적 질서 구현을 위한 최상의 수단이기 때문에 신분과 직위 따위와는 무관한 것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다음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친절의 상품화’, 즉 마음에 없는 친절, 상품으로서의 친절이다. 90도에 가까운 절을 하고 애써 웃는 웃음을 짓지만 물건을 사지 않으면 태도가 달라지는 판매원을 많이 본다. 서비스 업종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아예 손님에게 불친절한 경우도 많이 있다. 조금 기분 나쁘면, ‘내가 할 일이 없어서 이 일을 하고 있는 줄 아느냐?’하는 식의 태도와 표정을 보이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자기 직업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이 없기 때문이다. 직업의 귀천이 뿌리 깊은 우리의 의식구조 때문이겠지만, 이것은 외국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우리의 고질병 중에 하나인 것 같다.
우리의 ‘친절문화’ 다시 생각할 때
친절이 상품화되어서 파생되는 왜곡된 인식이 또 하나 있는데, 친절이 서비스업소 종사자들에게만 부과되는 덕목이고, 손님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인식이다. ‘손님은 왕이다’라는 구호 아래 손님은 종업원에게 함부로 하는 사례가 많이 있는 것이다. 친절에 손님이 성역이 될 수 없다. 친절이란, 두 사람 사이의 예의다. 친절이란 두 사람이 대화를 해나가기 위한 틀이지, 물건을 팔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따라서 손님도 지켜야 하는 규칙이다. 친절은 그 자체가 목적이지 다른 것의 수단이 돼서는 안된다.
우리의 친절문화, 다시 한 번 점검해 보는 것이 어떨까? 일본이 동경올림픽 전 해인 1963년에 ‘작은 친절운동’을 벌인 뒤 친절한 국민으로서의 세계적인 명성을 갖추었듯이.
박만규 아주대 불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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