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주사의 승무

근대문학의 국민시인 조지훈(1920~1968·경북영양 출생)이 쓴 시 ‘승무’(僧舞)를 옮긴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고깔에 감추오고 /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 빈 대에 황촉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버선이여 /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눈물 나도록 시리면서도 은근한 정감을 느끼게 하는 시어(詩語)다. 무상(無相)의 달관(達觀)이다. 시인도 많고 시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토록 많아도 승무를 형상화한 시는 이 한 편 뿐이다.

 

승무는 대표적인 민속춤의 하나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됐다. 유래에 대해 ‘억불숭유’ 이후 민간에 의해 재연됐다는 설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모두 확실치 않은 추측이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펴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승무가 체계적으로 집대성된 것은 1930년대다. 당시 국고(國鼓)로 불리도록 북을 잘 친 한성준이 춤사위와 가락을 정리하여 1934년에 세운 조선음악연구소를 통해 손녀 한영숙 등 문도들에게 전승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발달하여 뒤에 유명해진 것이 박금설의 경기승무다.

조지훈의 시 ‘승무’는 1939년 문예지 ‘문장’ 12월호에 발표됐다. 나이 스무 살에 이 시로 등단했다. 시의 산고(産苦)가 꽤나 컸다. 그리고 시의 산실(産室)이 다름이 아닌 바로 용주사다. 작가는 1956년에 펴낸 시론집 ‘시의 원리’(산호장 출판)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 편의 시가 이루어지기까지 어떠한 과정을 밟는가 하는 데 대하여 졸시 ‘승무’의 작시 체험을 말함으로써 시의 비밀을 토로하겠습니다. 내가 승무를 시화해 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기는 열아홉 때의 일이었습니다. (중략) 이 난산의 신(新)을 회태하기까지 나는 세 가지의 승무를 사랑하였습니다. 첫 번은 한성준의 춤, 두 번째는 최승희의 춤, 세 번째는 이름 모를 승려의 춤이 그것입니다. (중략) 참 승무를 보기는 열아홉 살 적 가을이었습니다. 그 가을 어느 날 수원 용주사에는 큰 재(齋)가 들어 승무 밖에 몇 가지 불교 전래의 고전음악이 베풀어지리라는 소식을 듣고 난 나는 그 자리에서 수원으로 내려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밤 나의 정신은 온전한 예술 정서에 싸여 승무 속에 용입되고 말았습니다. 재가 파한 다음에도 밤 늦게까지 절 뒷마당 감나무 아래서 넋 없이 서 있는 나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리하여 그 밤의 승무의 불가사의한 선율을 안고 돌아온 나는 이듬해 늦은 봄까지 붓을 들지 못하고 지내왔었습니다. (후략)’

 

작가는 이어 ‘내가 승무를 비로소 종이 위에 올리게 된 것은 스무 살 되던 해의 첫 여름의 일입니다’라고 했다. 그러니까 전년 가을에 시작된 산고가 이듬해 여름에 풀려 송년호에 발표하기까지 일 년도 더 걸린 셈이다.

 

승무는 스님만 추는 춤이 아니다. 속인도 스님처럼 차려입고 춘다. 여자만 추는 것도 아니다. 남자도 춘다. 조지훈이 그날 용주사에서 보고 그토록 용입된 승무는 아마 어느 말사의 비구니가 추었던 것 같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고깔에 감추오고 /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시어가 그렇게 말해 준다. 춤사위 또한 경기승무였을 것이다.

 

조지훈은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이다. 일제 말기엔 민족 정서로 항거했고, 광복 직후 카프(KAPF)의 프로문학에는 순수문학으로 문단을 지키고, 6·25 전쟁 중에는 종군문인단을 만들어 전쟁터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자유민주주의를 선양했다.

 

오는 9일 열리는 정조대왕 탄생 258주기(週期) 기념 ‘2010 화성 용주사 승무제’는 실로 뜻깊다. 조지훈이 승무를 보고 몰입했던 것도 지금과 같은 가을이다. 비록 우린 그 같은 시인은 못 되어도 절로 생기는 시심은 살아가는 생명의 양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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