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황제릉 김이순 著, 소와당 刊 대한제국 황제릉 탄생 배경과 숨은 이야기 담아
한국에 ‘황제릉’은 단 2기가 있다. 역사상 황제가 둘 뿐이었기 때문. 일제 침탈이 다가오던 때의 고종황제와 순종황제가 그들이다. 서울시 문화재전문위원인 김이순 홍익대 교수는 ‘대한제국 황제릉’(소와당 刊)에서 황제릉 탄생의 역사적 배경과 숨은 이야기를 낱낱이 밝히고 있다.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은 고종황제의 무덤이며, 유릉은 순종황제의 능이다. 하지만 고종과 순종이 묻힐 당시 그들은 이미 황제가 아니었다. 고종은 1907년 헤이그특사 파견이 문제가 돼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고, 순종 역시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제에 의해 ‘이왕(李王)’이 됐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 이들 무덤이 황제릉의 모양새를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실록에 따르면 홍릉이 황제릉으로 조성된 것은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으로 정신없던 1897년부터 고종이 이를 준비했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에 사람을 보내 중국 황제의 능을 모사해오도록 하고, 이를 바탕으로 1900년부터 황제릉을 조성했다. 능의 규모는 물론이고 능 자리, 침전, 연못 조성 등 세부사항까지 모두 계획하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홍릉은 규모 면에서 당시 표현대로 “역대의 능전보다 규모의 광대함이 실로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방위와 석물의 유무, 정자각 또는 침전의 모양 등도 전통 왕릉과 차이를 보였다.
그렇다면 순종의 유릉은 왜 수많은 아름다운 석물들이 세워진 황제릉으로 조성됐을까? 저자는 “조선왕조 말기의 졸렬한 모습을 보이는 홍릉의 석물과 달리 일제의 예술작품을 남겨두자는 의도였다”고 말한다. 곧 중국의 것을 본받은 조선의 예술은 훌륭하지 못하니 앞선 일본 문화를 보여주겠다는 ‘조선 식민화의 정당성’ 확보의 하나로 추진된 것이다.
책에는 고종 황제의 장례와 관련한 안타까운 사실도 담겨있다. 고종은 결국 황제릉 조성 사업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1919년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았는데, 원래 7개월장을 치러야 하는 황제장을 3개월장으로 축소해 치렀고 3.1 운동이 거셌던 시절이라 하관식도 남들의 눈을 피해 밤 10시에 거행했다. 값 2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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