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판 영화 ‘하녀’는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라는 양분화된 계급을 통해 부조리한 계급사회를 비판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를 해석할 수 있지만 가장 흥미롭고 인상적인 부분은 늙은 하녀 ‘병식’의 캐릭터다. 병식은 상류층가정 하녀의 신분으로써 뼈속까지 투철한 직업적 근성으로 완벽하고 빈틈없이 하녀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그녀의 실제 모습을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주인앞에서는 본분을 다해 예의와 격식를 갖춰 시중을 들지만 주인 뒤에서는 아더메치(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한)를 외치며 주인을 향해 욕설을 퍼붓기도 한다. 병식이 주인들의 극도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속물근성을 더 이상 참지 못해 주인집을 나갈 때는 하녀로서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그동안 아니꼽고 메스꺼웠던 주인들에게 거침없이 일갈을 날리며 당당하게 그 집 문을 나간다.
연출된 모습통해 상대방 파악
우리는 ‘병식’처럼 한평생 다양한 역할을 맡고 그 역에 맞는 가면을 쓰고 행동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 역시 그 사람이 쓰고 있는 가면을 보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평가한다. 즉 사람들은 자신의 역할에 따라 상황에 맞게 연출을 하고 타인은 그런 상대방의 모습을 통해 그의 인격이나 정체성을 파악한다.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나 위치에 따라 다른 얼굴로 대하는 것이다.
‘가면’ 연구의 대가 어빙 고프만은 “아마도 사람이라는 단어가 그 첫 번째의 의미로서 가면이라는 뜻을 지녔음은 결코 단순한 역사적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다소 의식적으로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하나의 인식일 것이다. 이러한 역할들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아는 것이며,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도 바로 이러할 역할들 속에서이다”라고 말한다. 때론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 사람의 속마음은 뭘까?”, “이 사람의 실체는 무엇일까?”, 가면 뒤에 숨겨진 실제 모습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이에 대해 조지 워싱턴대 법학과 제프리 로즌 교수는 굳이 타인의 가면을 벗겨서는 안된다고 했다. “교수인 나는 학생들을 대할 때, 동네 세탁소 주인을 대할 때 각각 다른 사회적 가면을 이용한다. 만약 이 가면들을 모두 강제로 벗겨버린다면 남는 것은 진정한 자아가 아니라 방어능력을 잃어버린 상처 입은 인간일 것이다.”
자신을 지켜주는 사회적 보호대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어야하는 현대인들은 상황에 맞는 다양한 역할을 능숙하게 수행해야 한다. 간혹 자신의 목적을 위해 가면을 진실을 가리기 위한 교묘한 술책이나 교활한 처세의 도구로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쓰는 가면은 가벼운 입김에도 소멸되고 만지기만 해도 부서져버릴 것 같은 나약한 자신의 영혼을 보호하기 위한, 그래서 외부로부터 받을지도 모르는 상처를 최소한 줄이고 자신을 온전히 지켜줄 수 있는 사회적 장치이며 보호대일 수 있다. 과장되어 말하자면 가면은 세상의 질서와 합의하에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한 프로정신의 또 다른 이름일 수 있다. 다양한 역할들 속에서 각각의 문법과 언어를 정확하게 따르고 구사하는 프로페셔널한 모습 말이다.
어떤 가면을 선택할지는 결국 자신의 가치관과 정체성에 달려 있다. 자신이 쓰고 있는 가면이 때가 많이 탔는지, 내면의 소리와는 동떨어진 낯선 모습으로 있는지 수시로 점검해 볼 일이다.
/이국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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