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멋대로 ‘판결’

판사가 판결하는 재판은 판사의 양심으로 한다. 민사재판도 이렇지만 민사재판은 판결보다는 소송 당사자인 원고와 피고 간에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화해 성립을 가장 좋은 재판으로 친다. 해서, 판사의 양심은 특히 형사재판에서 크게 작용된다.

 

판사가 판결하는 재판은 또 판사의 양식으로 한다. 예컨대 교양지식이 없는 판사의 재판은 기계적이다. 판사가 판결하는 재판은 또 판사의 인성에 좌우된다. 타고난 성정, 어릴 적 성장 과정, 사물의 체험 및 경륜, 인생관 등으로 형성된 것이 판사의 인성이다.

 

이럼으로 양심이 삐뚤어지거나 양식이 좁거나 인성이 삐딱한 사람의 판사는 판결 또한 삐뚤어지고 삐딱한 협량스런 판결을 낸다. 이를테면 ‘제멋대로 판결’이다. 재판은 법률과 법리에 따라 하는 것이지만, 판결 이유는 판사가 찍어다 붙이기에 달렸다.

 

‘제멋대로 판결’이 상급심이나 대법원에서 심리 미진, 법리 오인 등으로 깨져도 판사는 아무 책임이 없다. 재판의 자유심증주의 독립성으로 신분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자유심증주의는 사실 관계의 인정, 증거 능력 유무, 유무죄 판단이나 형량 결정 등을 판사의 심증에 일임하는 것이다. 즉 판사가 맘 먹기에 달렸다. 검사가 아무리 유죄 증거를 내놔도 판사가 아니라고 말하면 그만이고, 피고인이 아무리 무죄 증거를 내놔도 판사가 아니라면 이도 그만이다. 기소장의 사실 관계 역시 판사가 죄가 된다면 죄가 되고, 죄가 안 된다면 죄가 안 되는 작심 여하에 달렸다.

 

‘기교재판’이란 말이 있다. 사실심리와 증거조사 결과에 따라 판결의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고, 맘속에 이미 판결, 즉 결론을 내리고 재판을 하는 것이 ‘기교재판’이다. 이는 유무죄 간에 판결문의 법리는 얼마든지 왜곡이 가능하지만, 왜곡했다고 하지 않는다. 자유심증주의에 입각한 관점에서 그렇게 봤다고 하면 이 역시 그만이다. 자유심증주의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중세기적 법정증거주의의 기계식 재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문제는 공유화되지 못한 심증의 사유화로 즉, 남용이다.

 

인구는 별로 늘지 않는데 사건은 폭증한다. 현대생활이 복잡 다양해진 탓이다. 판사들도 많아졌다. 내가 법원에 나갈 땐 어느 법원의 부장판사라고 하면 만난 적은 없어도 이름은 다 알고, 다른 지역 평판사들도 알거나 알 만한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은 같은 판사들끼리도 생판 모르는 판사들이 수두룩하다. 해마다 사법시험 합격자를 무더기로 내고 새내기 판사도 100명 안팎을 임관한다. 판사 홍수시대다. 이에 자질론의 의구심이 대두되지만, 검증할 뚜렷한 방안이 있지 않다.

 

이러한 가운데 형사단독판사제의 법원 조직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30대 전후에 인생살이를 알면 과연 얼마나 알까, 아직은 인생 견습의 나이다. 이런 판사들이 배석판사가 아닌 단독판사로 내리는 판결에 독단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재판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고 물으면 뭘 모르는 소리다. 여과된 인생 경험의 성숙이 갖는 심증 형성과 인생 부지의 미숙이 갖는 심증 형성은 판이하다.

 

판사의 판결은 상식의 법제화다. 예상 밖의 판결과 ‘제멋대로 판결’은 구분된다. 사실심리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실체적 진실의 사실 관계가 드러나서 나오는 판결은 예상 밖의 판결이어도 상식에 합치된다. 그러나 실체적 진실의 변화는 없이 자의적으로 내리는 ‘제멋대로 판결’은 상식에 위배된다. 판결문에 고도의 전문 용어를 구사한다 해서 판결이 사회적 통념이나 상규를 위배하고, 공서양속을 준수해야 하는 상식을 넘어설 수는 없다. ‘제멋대로 판결’의 용어 기교는 궤변이다.

 

국회의장실에 난입한 민노당 당직자들을 형사단독판사가 공소기각 판결을 한 데 이어 역시 또 다른 형사단독판사가 내린 시국선언교사 무죄 판결로 꽤나 시끄럽다.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다만 판사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있다. 재판은 양심과 양식으로 하고, 판결에 인성이 따른다는 말을 부정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국민사회는 법원이 신뢰를 보여줄 때 법원을 신뢰한다.  / 임양은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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