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인상깊게 본 책이 있다. 사케미 게이치(酒見賢一)가 쓴 ‘묵공’(墨功)이라는 중국풍의 소설인데, 이 소설의 주인공은 묵자라는 사람이다. 묵자는 공자나 맹자, 순자처럼 군웅할거의 유교에 대항했던 기묘한 인물로 박애주의를 주장하면서 전쟁을 반대한 사람이다. 이러한 묵자가 만들어낸 전투집단이 바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신비의 묵자교단(墨子敎團)이다.
묵자교단은 박애주의라는 묵자의 사상을 이어받아 조직된 종교집단으로 전쟁에 이기기 위한 비정함을 가지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풍부한 인간성을 지닌 휴머니스트들이었다. 묵자교단의 주된 신도 계층이 상공업, 혹은 수공업자들이거나 다수의 협객들로 구성된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묵자교단이 철저한 전투 용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들이 절대로 남을 먼저 공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격보다는 뛰어난 고도의 수비능력과 병기제조기술, 그리고 탁월한 방어전술로 약소국의 지원요청을 받고는 천하의 어떠한 성도 잘 지켜냈다.
겸애(兼愛), 즉 천하에 남이 따로 없다는 ‘천하무인’(天下無人)을 바탕으로 전쟁을 배격하는 비전론(非戰論)을 내건 묵자교단은 이런 신념을 널리 전파하고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그들 스스로를 지키고자 했기 때문인지 대단히 전투적인 모습을 보인다. 공격하지 않음으로써 성을 지킨다는 이른바 ‘비공’의 의미는 묵자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지만 묵자의 수비는 온몸을 다 바쳐 끝까지 지키기 때문에 단순한 피동적 수비와는 다르다. 일종의 공격적이고도 능동적인 수비이다. 그래서 공격자에 대하여 항복을 서두르지 않고 끝까지 자기를 지킴으로써 항복보다 더 나은 민중의 주체적 삶을 보장받기 원했다고 볼 수 있다. 200여년 동안 활동한 이 신비한 교단은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역사의 무대에서 흔적도 없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따라서 묵수(墨守)라는 말은 묵자(墨子)의 지침에 따라 굳건히 성을 지킨다는 묵자교단의 전법에서 유래된 말로 자기의 의견이나 주장을 굽히지 않고 굳게 지킴을 의미한다.
경인년 새해가 힘차게 시작됐다. 교수신문은 금년도 사자성어로 ‘강구연월’(康衢煙月)을 선정했다. 강구연월은 ‘번화한 거리에 달빛이 연기에 은은하게 비치는 모습’을 나타낸 말로, 태평성대의 풍요로운 풍경을 묘사한 글이다. 이는 올해 우리 국민이 분열과 갈등을 넘어 상생과 화합의 시대로 나아가기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은 표현이다. 강구연월 외에 ‘편안할 때 위태로울 때의 일을 생각하라’는 거안사위(居安思危), ‘때를 벗기고 잘 닦아 빛을 낸다’는 의미의 괄구마광(刮垢磨光) 등도 새해의 사자성어 후보로 꼽혔다. 정치인들도 이에 뒤질세라 새해의 각오로 태화흥국(泰華興國), 청정무애(淸淨無碍), 호시우행(虎視牛行), 지족불욕(知足不辱), 수능재주 역능복주(水能載舟 亦能覆舟), 기호지세(騎虎之勢), 여민동락(與民同樂), 절전지훈(折箭之訓) 등을 새해의 묵수로 피력했다.
우리들도 지금 이 순간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옳다고 믿고 반드시 지켜야 할 나만의 묵수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시점이다. 이왕이면 우리들의 묵수가 경쟁과 우위를 추구하는 방향이 아닌, 상생과 소통에 바탕을 둔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갔으면 좋겠다. 나만의 행복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우리 이웃을 먼저 배려하고 사회와 공공선을 향해 헌신하는 묵수가 됐으면 한다.
/김 우 자혜학교 교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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