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세계 경제위기 이후의 새로운 성장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폐막했다. 미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이후 처음으로 참석하는 APEC 정상회의이므로 국제적인 관심을 끌 수 있는 회의이었지만, 텍사스 총기난사 사건으로 관심이 분산되었고, 우리 국내에서는 부산 사격장에서의 일본인 단체관광객 사망으로 APEC 관련 뉴스는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게 되었다.
APEC은 1989년 11월 호주 캔버라에서 우리나라, 미국, 호주, 일본, 아세안 일부 국가 등 12개국 통상장관들이 참여하여 결성되었고, 이후 중국, 러시아 등을 포함한 21개 회원국으로 확대되었다. APEC은 세계 인구의 1/3, 세계 국민총생산과 교역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지역의 경제협력과 무역자유화 촉진을 논의하는 국제회의이다.
1994년 클린턴 대통령과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주도하여 선진국은 2010년, 개도국은 2020년까지 무역자유화를 실시한다는 보고르목표를 APEC 선언문에 포함시켰고, 이어 보고르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논의가 몇 년간 진행되면서 APEC의 국제적 위상은 급속히 높아지게 되었다.
하지만, 1997년말 발생한 동아시아 금융위기 과정에서 APEC의 역할이 거의 없었고, 보고르목표에 대한 논의만 있었을 뿐 실질적인 진전은 없었기에 ‘말만 있고 행동은 없는(talk shop)’ 회의로 비춰지게 되었다.
당초 예상과는 달리 금년 싱가포르 APEC 정상회의도 화려한 말잔치 속에 폐막했다. APEC 정상들은 APEC 경제의 신성장 패러다임의 3대 축으로 균형 성장, 포용적 성장, 지속가능한 성장을 제시했다. 중장기 성장 잠재력을 확충하면서 회원국간 발전 격차를 줄이고, 중소기업, 일자리, 여성, 사회안전망 구축에 관심을 기울이고, 기후변화 대응과 환경친화적 성장 추구를 촉구했다. 모두 바람직한 내용이지만, 사실상 매년 되풀이되는 내용이다.
다만,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은 올해에는 시장경제의 기본원칙을 중시하면서도 시장만능주의의 부작용을 줄여야 한다는 점을 추가한 점이 특징이다. 모두 시의성이 높고 현재의 국제경제환경에 적절한 내용이지만, 어느 회원국도 구속력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지 않고 있기에 ‘듣기 좋은’ 말을 부담없이 정상회의 선언문에 포함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올해 APEC 정상회의는 아태지역 무역자유화, 즉 APEC FTA 창설에 대해 논의했다. 지난 2004년 칠레 산티아고 APEC 정상회의 이후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사안이다. 이런 엄청난 제안에 대해 어느 회원국도 반대하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로운 점이다. 이 역시 어차피 추진되지 않을 사안이므로 굳이 반대의견을 피력해서 ‘말 잔치’에서 흥을 깰 이유가 없다는 점이 주로 작용한 결과이다. 중일 FTA도 추진되기 어려운 상황에 APEC 21개국간 FTA 실현가능성이 있겠는가?
APEC FTA는 잊혀져 가던 보고르목표를 대체하는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APEC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제고시키는 효과를 일부 기대할 수 있겠으나,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점이 이미 알려져 있어 활용시한도 향후 몇 년이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수많은 부처와 인력이 APEC 회의에 매달리고 있고, 국내용 회의결과를 널리 유통시키고 있지만 인력과 노력에 비해 실익은 극히 제한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APEC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든지, 관련 비용을 줄여 투입비용대비 효율성을 높일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정인교 인하대 교수·정석물류통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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